2016.11.27. 스타트렉 구뉴전에 낸 신간.
2017.02.04 커크스팍 배포전에 재판을 위한 샘플 게재.
어째서 인간은 23세기에도 구시대적 버릇을 버리지 못 한 걸까. 한탄이 절로 나왔다. 알타미드 행성의 사후조사를 하루 앞두고 성운 항해 기록을 요청했더니 직접 와서 가져가란 대답이 돌아왔다. 요크타운 내의 기록보관소는 타운의 중심부에 위치한 요크타운 본부 내에 있었다. 그리고 현재 커크가 머물고 있는 숙소는 본부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투덜거려봤자 어차피 갈 사람은 자신뿐이라 아침부터 착실히 기록보관소를 찾아가 착실하게 자료를 받아왔다.
요크타운 본부 앞에 널브러져 있던 프랭클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형편없이 으깨진 도로만 아니었더라면 아무도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현재 프랭클린호는 격납고로 옮겨졌으며 남아있는 기록이 정리되면 스타플릿에서 전시용으로 인계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커크는 한창 도로 보수공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인부들을 보다가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요크타운 본부 못지않게 높이 솟아있는 건물들 중에서도 유달리 커다랗고 눈에 띄는 간판이 있었다.
‘요크타운 박물관.’
연방에 소속되거나 연방에 우호적인 종족들이 모두 모인 요크타운의 특성을 반영하여 연방 의회에서 야심차게 개장한 박물관이었다. 연방에 가입한 행성이라면 누구나 박물관 내에 자신의 종족을 소개하는 전시관을 둘 수 있다. 박물관이라는 표지가 붙어있지만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좀 요란한 자기소개서 느낌이다. 요크타운에 처음 왔다면 기념 삼아 한 번쯤은 방문하기도 한다는 나름 이름이 있는 명소였다.
하지만 실제로 우주를 탐험하며 대부분의 연방소속 종족들과 직접 만나는 걸 직업으로 삼고 있는 스타플릿의 사람들에게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 곳이었다. 어부는 굳이 교과서에 그려져 있는 물고기들을 보며 감탄하지 않으니까. 엔터프라이즈호의 대원들도 간만의 휴가에 들떠 휴가계획을 줄줄이 나열했지만 누구도 요크타운 박물관을 언급하지 않았다. 커크 또한 저곳에는 크게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커크의 주변에서 딱 한 명, 저 요크타운 박물관에 관심을 가지는 이가 있었다.
‘요크타운 박물관은 한 종족이 그들이 가진 정치·경제·문화적 요소 중 그들을 대표하는 부문들을 선정하여 전시해둔 곳입니다. 그 종족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장 잘 반영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묻자 스팍은 마치 준비한 마냥 저렇게 대답했다. 연방의회에서 뿌듯함을 느낄 만큼 건전하고 박물관이 세워진 목적에 부합하는 방문사유였다.
높낮이 없이 평이한 어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투. 또박또박 정확하게 이어지는 단어들. 자신이 가보고 싶은 장소에 대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읊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바로 울리는 듯했다.
문득 커크는 자신이 하루 종일 스팍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 *
당연히 커크는 함장으로서 자신의 부함장이자 일등항해사인 스팍에게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또한 그는 하프벌칸이 친애의 의미를 표현하는 몇 안 되는 친구로서도 스팍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 커크가 깨달은 것은 조금 다른 의미이다.
최초는 생일파티 이후 조촐하게 가졌던 뒤풀이에서부터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섬세한 의사양반을 필두로 대원들이 준비한 깜찍한 생일파티가 끝나고, 스코티는 함장님의 생일을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며 커크와 맥코이를 따로 불러냈다. 어디까지나 명목이 그렇다는 이야기고 속내는 그냥 생일이라는 핑계거리가 생긴 김에 마시고 죽자는 거였다.
세 사람은 함내에서 각자 수석 기관실장, 수석 의료장교, 함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항상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가야하는 사람들이다. 우주를 떠다니며 코가 삐뚤어지게 마신다는 건 최소한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지나친 음주가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을 맥코이도 오늘은 스코티에게 동조했다. 커크 또한 두 발을 땅에(온전한 의미에서의 땅이라고 하기는 미묘하지만) 붙인 김에 그동안 못 삐뚤어졌던 코를 다 부러뜨리자는 말에 마음이 동한 건 사실이었다. 그 다음날 고생할 걸 알면서도 오늘은 일단 술독에 빠져 죽는 게 아직 인간들에게 남아있는 야만적인 습성이었다.
그리고 이 모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명의 외계인이 합류했다.
“스팍?”
“함장님.”
“밖에선 짐이라 불러.”
커크는 딱딱한 호칭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스팍을 빤히 쳐다보았다. 비이성과 비논리의 집합체가 되자고 뭉친 모임에 스팍이 함께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네가 여기 낄 줄은 몰랐는데.”
“닥터 맥코이의 말씀으로는 여기에 모인 세 분이 지금부터 다량의 알코올을 섭취하실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입니다만 그것이 지구인들의 문화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과도한 알코올의 섭취로 인한 돌발행동이나 사리분별을 하지 못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에 따라 세 분과 가장 잘 아는 저에게 연락을 하신 건 합리적인 일입니다.”
자신이 합류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벌칸 뒤에 맥코이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서있었다.
“이런 날은 청소부가 필요하지.”
스팍은 오늘의 주정뱅이 처리반이라는 매우 구린 역할을 맡은 것치고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논리의 끝을 보게 될 벌칸이 측은하여 커크는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스코티가 자신만만하게 셋을 끌고 온 곳은 커크도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바였다.
“여기 술이 끝내주거든.”
요크타운에 있는 술집 이름이 엔터프라이즈호에까지 퍼져있으니 가히 명성이라 할만 했다. 그 명성에 걸맞게, 또 요크타운에 걸려있는 바답게 익숙한 술부터 시작해 듣도 보도 못한 술들까지 주르륵 즐비해 있었다.
“난 스카치 한 병.”
“스코티, 여기까지 와서 스카치를 마셔야겠어?”
“오늘 밤새 마실 건데 익숙한 걸로 시작해야지. 다짜고짜 레귤러스V의 거대 뱀장어-새로 담근 술 같은 걸 들이붓고 싶진 않거든.”
“그럼 난 사우리안 브랜디.”
“스팍, 넌?”
“벌칸은 알코올을 마셔도 지구인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분위기상 들고 있으란 거지, 분위기상.”
그러면서 맥코이는 자기 몫의 로뮬란 에일과 함께 스팍 몫의 로뮬란 에일을 멋대로 주문해 억지로 손에 쥐어주었다. 스팍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맥코이를 노려보긴 했지만 달리 거절하지는 않았다.
네 개의 잔이 가볍게 부딪혔다. 건배는커녕 술 마시는 문화도 없는 벌칸은 꽤 자연스럽게 그 행위에 동참했다. 각자가 주문한 술은 만족스러웠다. 자칭 스카치 전문가인 스코티는 이 바의 술이 얼마나 수준 높은 것인지에 대해 떠들어댔고, 술이라면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일가견이 있는 맥코이도 동참했다. 커크는 중간 중간 그들의 허풍에 토를 달았다. 스팍만이 마시지 않은 로뮬란 에일을 들고 멀뚱히 있었다.
기분 좋게 한 잔 더 마신 스코티가 말했다.
“엔터프라이즈 수리가 꽤 걸릴 것 같단 말이야. 적어도 반년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빨리 건조될 수 있다는 게 더 놀라운데.”
“스타플릿의 기술력과 요크타운이 보유한 자원을 고려할 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제발 술자리에서까지 우주선 얘기는 안 끌고 오면 안 되냐. 난 아직도 망할 외계인 놈들 함선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리거든?”
“외계인 함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번에 프랭클린호가 처박은 크롤네 함선 중에 프로그램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게 하나 있어서 그걸 뒤져보는 중이라 하더라고요.”
“흥미롭군요. 그 우주선은 기계와 감응하는 능력을 단일화하여 서로 상호조정을 통해 움직이는 구조입니다. 이 기술을 적용한다면 생각만으로 항해가 가능한 함선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거 항해사가 깜빡 졸았다간 우릴 다 이름 모를 행성으로 처박아버린단 소리지?”
“본즈, 제발…….”
맥코이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대화 상대를 만난 스코티와 기술적 호기심이 충만한 스팍은 미래의 우주선에 대한 토론을 펼쳐나갔다. 커크 또한 생각만으로 조종이 가능한 우주선이라는 부분에 관심이 동해 그들의 대화에 끼었고, 우주선이라고는 쥐뿔만큼도 관심 없는 맥코이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다 넷 중 유일하게 그 우주선을 조종해본 인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화의 중심으로 끌려 나와야 했다.
“조종했을 땐 어땠수?”
“궁금하면 직접 타보던가.”
“현재 시점에서 닥터가 유일하게 조종경험이 있으시므로 우주선 항해기술 연구에 도움이…….”
“젠장, 그 빌어먹을 우주선 얘기 한 번만 더 꺼냈다간 콧구멍에 술을 부어버릴 거야.”
거의 알레르기 반응에 가까운 맥코이의 반응에 술자리에서의 우주선 얘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우주선 얘기가 끝나자 남자 넷이 모여서 할 얘기라곤 뻔했다. 커크는 스코티에게 처음 요크타운에서 상륙휴가를 같이 보냈던 로메인 소위에 대해 물었다. 스코티는 미묘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였다.
“왜? 분위기 괜찮아 보이더니?”
“크롤한테 잡혀갔을 때 같이 있던 여자랑 눈이 맞았던데요.”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스코티가 로메인 소위를 찾았을 때 그녀는 옆에 있는 오리온 여성과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게 친구 사이의 분위기가 아니라는 건 연애 눈치가 없다고 타박 받던 스코티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중에 그녀는 멋쩍은 얼굴로 마르타 중위와 좋은 관계로 발전하게 됐다는 말을 전했다.
“원래 위기상황에서 눈 맞으면 답이 없지. 그런 거랑 관련된 말도 있지 않나?”
“흔들다리 효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그래, 그거.”
커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스팍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넌 어떻게 됐어?”
“아까 보니까 우후라 대위랑 잘 얘기하는 것 같던데요?”
“휴가도 미스 우후라랑 보낼 거지? 뭐할 거냐?”
이제 대화의 방향은 이중 유일하게 애인이 있는 벌칸에게로 쏠렸다.
엔터프라이즈호의 대원들 모두 사흘간의 휴가를 얻었다. 스타플릿 본부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에디슨 사건에 대한 보고를 듣고 싶어 했지만 크롤의 침공으로 요크타운의 통신 시스템이 먹통이 되는 바람에 보고는 사흘 뒤로 밀려났다. 휴가의 뒤에는 무지막지한 진상규명 및 사후처리 작업과 그에 대비한 어마어마한 서류 처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실로 오랜만의 휴가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휘말려서 잃어버린 휴가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모두가 이 귀중한 사흘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했고, 대부분의 연인들은 단둘이서 보낼 수 있는 이 기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 스팍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갑작스레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문에 눈만 깜박이던 스팍이 입을 열었다.
“왜 제가 니요타와 휴가를 함께 보낼 거라 생각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뭐? 그거야 너넨…….”
거기까지 말한 커크는 본능적으로 뒷말을 삼켰다. 스팍의 대꾸에 설마 싶었지만 그렇다고 차마 내뱉을 수도 없는 가능성 하나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스코티와 맥코이도 같은 생각인지 입을 꾹 다물었다. 세 사람이 갑자기 말이 없어지자 고개를 갸우뚱하던 스팍이 말을 이었다.
“저와 니요타는 더 이상 연인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가 니요타와 휴가 기간 동안 함께 보낼 이유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연애하는 벌칸 좀 놀려보려다가 더없이 껄끄러운 상황에 처한 셋은 할 말을 찾지 못 했다. 커크가 총대를 메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미안…….”
“함장님께서는 저와 니요타의 관계 사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불필요한 사과입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보려던 커크의 시도는 대실패로 끝났다. 다른 물꼬를 찾지 못 해 진공 같은 침묵이 이어지자 짜증이 난 맥코이가 아무도 먼저 하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좋아 죽으려고 했잖아?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떻게 해야 몇 시간 만에 갑자기 쫑날 수 있는 거냐?”
“그래! 분명 우후라도 목걸이 하고 있었는데.”
커크는 분명 생일파티에서 영롱한 파란 보석을 목에 걸고 웃고 있는 우후라와 보고서도 쌩까고 우후라와 함께 있는 스팍을 보았다. 맥코이의 말마따나 아까만 해도 서로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연출을 해대더니 지금은 또 헤어졌단다. 세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니요타에게 준 목걸이는 제 애정과 존경을 담아 건넨 선물입니다. 또한 친애하는 이에게 준 선물을 돌려받는 건 벌칸 관습에 어긋난 일입니다. 그녀와의 연인관계가 종료되었다고 해서 주었던 선물을 돌려받는 건 비논리적입니다. 또한 연인관계가 종료되었다고 하여 그녀와의 친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스팍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지금 본인이 했던 말로 몇 가지 중요한 단서들을 흘렸다. 그가 아직도 떠나간 연인을 친애하고 있다는 것과 그의 그런 태도로 봐서 이별을 먼저 이야기한 쪽은 우후라일 거라는 것. 그녀를 향한 친애는 여기 있는 세 사람을 향한 친애와는 차원이 다른 종류일 거라는 것. 스팍의 목소리는 업무 보고를 읊을 때와 다를 바 없었으나 담긴 내용에는 감정이 뚝뚝 묻어났다.
논리를 가장한 미련을 가만히 듣던 커크가 스팍에게 물었다.
“벌칸은 뭘 먹어도 안 취해?”
“그건 아닙니다. 당류를 과다 섭취하면 지구인이 취한 효과와 유사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스팍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맥코이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초콜릿 위스키 하나!”
“닥터 맥코이, 벌칸에게 당류는 원활한 신진대사를 방해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그래서 주문한 거야.”
스팍은 로뮬란 에일을 쥐어줄 때와 다르게 반박했지만 맥코이는 주문을 취소하지 않았다. 빙글빙글 웃는 맥코이를 노려보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커크가 과장된 동작으로 그의 등을 두들겼다.
“이럴 때 지구에서 자주하는 말이 있지. 마시고 잊어버려. 세상에 걔 말고도 여자 많다. 걘 너한텐 좀 아깝긴 했어.”
“셋 중 어느 것도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아니군요.”
까만 눈동자가 노려보는 대상을 맥코이에서 커크로 바꿨다. 스코티가 옆에서 맞장구를 친답시고 처음 들어보는 스코틀랜드의 방언을 언급했고, 그 사이 스팍의 앞에는 초콜릿 위스키가 준비되었다. 스팍은 반짝이는 여섯 개의 눈이 보내는 무언의 압력에 못 이겨 잔을 들어 아주 조금 초콜릿 위스키를 삼켰다.
“어때?”
잔에서 입을 뗀 스팍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로 그가 ‘흥미롭다’고 말할 때 나오는 제스처였다.
“흥미롭군요. 과일류에서 나는 단 맛과는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고는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홀짝거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스팍의 반응에 신이 난 세 사람도 연거푸 주문하며 마셔댔고, 그 때부터 모임의 목적에 맞는 술 파티가 시작되었다. 기계감응을 통해 조종하는 우주선만큼이나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술안주 삼아 잔을 비우다 보니 테이블 위에 잔이 쌓여갔고, 잔들은 어느 새 병으로 바뀌었다. 세 사람은 머리에서 떠오르는 말을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댔다. 말을 꺼내는 사람만 있고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외계인 한 명은 꿋꿋하게 마시기만 했다.
가장 먼저 목적을 달성한 건 스코티였다. 그는 평행세계와 현재의 세계를 연결하는 블랙홀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론을 마구 떠들어대다가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
그 다음으로 목적을 달성한 건 놀랍게도 다른 목적으로 모임에 참가했던 스팍이었다. 그는 스코티의 이론에 따박따박 반박하다가 스코티가 고꾸라지자 그를 마구 흔들어댔다.
결국 주정뱅이들을 치우는 청소부 역할은 커크와 맥코이에게로 돌아갔다.
“이러려고 뾰족귀 자식을 끌고 온 게 아니라고! 망할,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홉고블린 같으니!”
평소라면 맥코이의 말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닥터의 방금 발언은 종차별적인 요소를 내포한 발언 어쩌고 하면서 훈계를 해댈 스팍은 안타깝게도 정신이 반만 육체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네 명 모두 현재 스타플릿에서 제공하는 관사에서 머물고 있어서 이 놈 집이 어디인지 추리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었다. 맥코이는 욕을 하며 자신과 가까운 숙소에 머물고 있는 스코티를 질질 끌고 나갔다. 술 취한 외계인은 자연스레 커크의 몫이 되었다.
커크는 멍하니 스코티의 빈자리만을 바라보는 스팍을 조심스레 불렀다.
“스팍? 일어설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짐. 제 신체기능은 평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일어나는데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기우뚱거렸다. 본인은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서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놀고 있네. 술 먹은 놈이 안 취했다고 우기는 건 벌칸이라고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커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취한 벌칸의 흑역사를 놀려볼까 하다가 기억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다행히 스팍은 거의 업혀나간 스코티와는 다르게 제 두 발로 걸을 수 있긴 했다.
둘이 바를 나왔을 때는 사방에 어둠이 깔려 있었다. 밝을 때만 해도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이던 거리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텅텅 비었다. 요크타운은 인공적으로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했고, 그 덕에 밤이 되었다고 해서 추워지진 않았다. 머리 위로 비스듬히 서있는 건물들과 구조물이 빼곡히 들어서있었고, 사이사이로 별이 빛났다. 이따금씩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커크는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올라온 취기를 즐기며 서늘한 바람을 만끽했다. 취해서 제대로 걷지 못 할 스팍을 생각해 천천히 걷다가 이따금씩 스팍이 저를 잘 따라오나 뒤돌아 살폈다. 그는 주정뱅이치고는 꽤나 멀쩡한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평소처럼 이지적으로 반짝이는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두 뺨은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커크가 스팍을 제 쪽으로 끌고 오려고 할 때였다.
“먼저 이별을 이야기한 쪽은 그녀였습니다.”
대뜸 스팍이 말했다. 커크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벌칸의 입에서 묻지도 않은 사생활이 튀어나오다니. 아무래도 초콜릿 위스키의 힘은 생각보다 더 강한 모양이었다.
“왜?”
“그녀가 말하기를 제게 가지고 있던 그녀의 감정이 변하였고, 이에 따라 더 이상 연인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너무 흔한 이유여서 싱거울 정도였다. 마음이 변했다라……. 커크의 머릿속에 아까 바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퍼뜩 스쳐 지나갔다.
“설마 거기도 다른 놈이랑 흔들다리, 뭐 그런 거야?”
“그런 건 아닙니다. 따로 교제하고 싶은 대상이 있는 건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럼 그냥 단순히 마음이 변한 거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넌 거기다 대고 넙죽 예이 하고 헤어졌단 말이야?”
“‘예이’라고 대답하진 않았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야 이 멍청한 새…….”
커크는 욕지거리가 목구멍 밖으로 나갈 뻔한 걸 간신히 붙잡았다. 기분 좋게 올라왔던 술기운이 삽시간에 증발됐다.
“붙잡기라도 했어야지.”
“타인의 감정을 제 마음대로 조절하려는 건 비논리적인 일입니다.”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그럴 때 지구인들은 ‘내가 무슨 잘못했어?’ ‘내가 더 잘할게.’ ‘가지 마.’라고 하거든? 적어도 한 번은 그래야 할 거 아냐.”
“저는 벌칸입니다.”
“반은 인간이잖아.”
“그렇다고 하여 벌칸에서 나고 자란 제가 인간의 관습을 모두 따를 수는 없습니다.”
이 새끼 안 취한 거 아니야? 커크는 얼굴만 푸르게 물들이고 꼬박꼬박 지 할 말 다하는 외계인을 노려보았다. 안 취했을 때는 미련이 넘쳐 보이더니 오히려 취하고 나니까 맥코이가 말하는 컴퓨터 상태가 되었다. 그는 커크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초콜릿 한 잔 마시고 진탕 취해 다 잊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당사자가 괜찮다면 좋은 일인데 말투가 너무 괜찮아서 괜히 열이 뻗쳤다.
커크가 마구 머리를 헝클며 갈 곳 없는 분노를 표출하자 스팍이 고개를 기울였다.
“짐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화난 거 아니야. 짜증난 거지.”
“이미 끝난 일로 감정을 소모하는 일은 비효율적입니다.”
지금 내가 짜증나는 이유는 너와 우후라의 일 때문이 아니라 너의 말투가 짜증나기 때문이거든? 콱 한 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그냥 삼켰다. 취한 벌칸과 대화를 하는 건 취한 인간과 대화하는 것보다 배로 스트레스를 가져왔다. 전혀 말이 안 통했으며 오히려 재수 없는 논리력만 강화되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열 뻗치게 만들었다. 커크는 스팍과 대화하는 걸 포기했다.
“그래. 내가 바로 비효율과 비논리의 인간이다.”
그리고 스팍의 어깨에 냅다 팔을 둘렀다. 자기 한 몸 챙기기도 힘든 벌칸은 답지 않게 살짝 휘청거렸다. 어쨌든 본인이 괜찮다니 다행이다. 커크는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주정뱅이 흉내를 내며 몸을 휘청휘청 흔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꼼짝도 안 했을 스팍이 커크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커크는 그런 스팍이 조금 귀여워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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