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15. 그레덴스 배포전에 낼 신간 샘플.
울워스빌딩의 가장 깊은 곳에는 설계자조차 알지 못하는 비밀의 공간이 있다. 마법사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17칸을 내려간 뒤에도 왼쪽으로 6칸, 앞으로 3칸을 이동해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머리가 천장까지 닿는 거인족 두 명이 몸수색을 했고, 이를 무사히 거치면 문 앞에 선 천둥새 조각이 내는 네 가지 물음에 하나도 틀리지 않고 대답해야 했다. 심지어 질문은 매일 바뀌었다.
이 까다로운 절차를 모두 거쳐야 천둥새가 비로소 문을 열어주었다. 문으로 들어가면 곧장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양쪽으로 철문이 늘어선 긴 복도가 나왔다. 천장은 한 사람이 간신히 서있을 정도로 낮았고,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는 흐린 조명이 전부였다. 양쪽으로 늘어선 철문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고 누구도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안쪽에서 간간히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방안에 누군가 있음을 짐작만 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마법의회에서 특히 중범죄자를 수감하기 위해 만든 이 지하 감옥은 의회 최고 수준의 보안을 자랑했다. 그런 만큼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 드물게 손님이 찾아왔다.
그레이브스는 빠르게 걸었다. 바닥에 구두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렸다. 다른 문에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명백했고, 쓸데없이 다른 곳에 시선을 둘 이유는 없었다.
발걸음은 제일 커다란 철문 앞에서 멈췄다. 그레이브스가 가볍게 지팡이를 휘두르자 강력한 잠금 마법이 걸려있던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수감실 안에는 왜소한 소년 한 명뿐이었다. 소년은 안에 마련된 간이침대도 아닌 바닥 모퉁이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바짝 세운 무릎을 팔로 꽉 끌어안고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발목에는 굵은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족쇄가 연결된 쇠사슬은 벽 한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소년은 인기척을 느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발소리가 제 쪽으로 다가올 때마다 움츠린 어깨가 크게 요동쳤다. 그레이브스가 세 발짝을 남기고 소년의 앞에 섰을 때, 소년은 온몸을 떨었지만 고개는 들지 않았다. 그레이브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소년의 머리를 조심스레 쓸어주었다.
“크레덴스,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널 데리러 왔으니까.”
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떨림은 멎어있었다.
* * *
크레덴스 베어본은 옵스큐러스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 만에 베어본 고아원에서 발견되었다.
베어본 고아원의 수색을 맡았던 오러 샘은 임무를 게을리 했다는 이유로 약간의 문책을 받았다. 그로서는 실로 억울할 것이, 베어본 고아원을 처음 수색할 당시 그 어디에도 크레덴스는 없었다. 멀린에게 맹세코 그는 임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수색에는 샘뿐만 아니라 두 명의 오러가 함께 했다. 오러 셋이 건물을 들어낼 기세로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샘과 동료들은 총 8시간에 걸친 수사 끝에 노마지 경찰관들이 이곳을 발견해도 좋다는 결론을 내렸고 현재 임시로 보안국장을 맡은 피쿼리에게 직접 보고하였다. 피쿼리는 베어본 고아원을 둘러싼 결계를 해제해도 좋다고 승인했다.
결계를 해제하고 이틀 뒤 고아원에서 밥을 얻어먹던 아이의 신고로 노마지 경찰관들이 메리 루 베어본과 체스티티 베어본을 발견했고, 즉시 모녀의 사망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했다. 며칠의 수사 끝에 뉴욕 경찰은 메리 루가 낡은 2층 난간에 기대었다가 추락사하였고, 그녀의 딸인 체스티티는 떨어지는 엄마를 붙잡다 동반 추락사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모녀에게는 다른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시신은 국가 차원에서 수습되었고, 사라진 아들인 크레덴스 베어본과 어린 딸 모데스티 베어본에게 실종 선고가 내려졌다.
노마지들 쪽에서도 사건이 끝났고, 마지막으로 고아원에 미미하게 남은 마법의 흔적을 지우면 마쿠자에서도 끝나는 일이었다.
“노마지 경찰들은 사건 현장도 안 치우고 수사를 종결하는 거야?”
브래드가 바닥에 널브러진 나무판자를 걷어찼다.
그의 말대로 처참했던 시신 두 구가 수습된 것 빼고는 모든 게 그대로였다. 두 동강 난 테이블과 거꾸로 뒤집어진 의자, 부러진 십자가, 원래 무엇이었는지 형태를 알기 힘든 나무판자 조각들, 산산조각 난 그릇들과 갈기갈기 찢어진 세일럼회의 깃발.
“이 고아원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이대로 폐허로 남겨두는 건 아니겠지?”
“노마지들 말로는 유일한 상속자인 아들이랑 딸이 실종돼서 공매로 넘어갈 것 같다던데. 이 난장판은 집을 산 사람이 치우겠지.”
마법사 소유의 건물이라면 지팡이를 한 번 휘두르는 걸로 모두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겠지만 노마지들의 것은 일일이 쓸고 닦고 손봐야했다. 이 집이 제 모습을 찾는 건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일 것이다.
다른 동료는 둘의 대화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 찢어진 세일럼회의 전단지를 읽고 있었다. 브래드는 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발끝에 걸리는 작은 벽돌 조각을 걷어찼다. 빠르게 날아간 조각은 벽에 부딪혀 계단 쪽으로 튕겼다. 브래드가 걷어찬 조각을 따라 움직이던 샘의 시선도 계단 앞에서 멈췄다. 브래드는 돌멩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부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샘은 계단으로 다가갔다. 옵스큐러스의 공격으로 한 번 심하게 흔들렸던 계단은 샘이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위태로운 소리가 났다. 이러니 노마지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메리 루와 그의 딸의 사인을 추락사라 단정 지었던 거겠지. 노마지들의 수사 과정을 곰곰이 되씹어보며 계단을 오르던 샘은 채 2층에 다 올라가기도 전에 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첫 수색 때는 본 적 없던 소년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이쪽으로 올라와봐, 당장.”
샘은 소년이 깰까봐 아주 작은 소리로 1층에 외쳤다. 조용한 목소리엔 초조함이 잔뜩 껴있었다. 동료들은 지팡이를 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계단 하나하나를 밟았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분명 첫 수색 때는 본 적 없었다. 노마지들의 수사 때에도 없었다. 있었다면 진작 노마지들이 처리했을 것이다. 여태 여기에 누워 있을 리 없다. 샘은 긴장감에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고 천천히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미동조차 없었다. 죽은 걸까.
“세상에, 크레덴스!”
계단을 올라온 티나가 소년을 보자마자 비명 같이 외치며 달려들었다. 샘과 브래드가 차마 말리기도 전이었다.
“티나! 당장 그 애한테서 떨어져!”
티나에게 샘의 경고 따위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오로지 소년을 살피기에 바빴다. 그녀는 다급하게 소년의 머리맡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숨이 붙어있는지 확인했다. 소년은 미약하게나마 숨을 내뱉었다. 티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년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물러서, 티나.”
동료에게 이러고 싶진 않지만 이대로 둘 순 없었다. 샘은 옵스큐러스 사건 당시 그 현장에 있었다. 그는 이 소년이 누군지 알았다.
뒤통수에 지팡이를 겨누자 그전까지 경고를 무시하던 티나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샘과 브래드의 지팡이 앞에 섰다.
“이 애를 죽여서는 안 돼.”
“헛소리 하지 마. 너도 쟤가 뭔지 알잖아.”
“알아.”
티나는 샘의 지팡이 끝을 잡았다.
“아니까 안 된다는 거야. 대통령께 보고도 안 하고 우리끼리 처분을 결정할 순 없어.”
“쟤가 옵스큐러스인 걸 뻔히 아는데 ‘좋아. 대통령께서 승인해주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자.’ 이러자고?”
“내 말은, 적어도 마쿠자로 체포해가야 한다는 거지.”
“마쿠자로 데려가자고? 쟤를? 그러다가 정신이라도 차리면? 울워스빌딩을 흔적도 안 남기고 다 부술 텐데 그땐 어떻게 하려고!”
“쟨 아무것도 부수지 못해!”
샘이 윽박지르자 티나의 언성도 따라 높아졌다.
“마법이라고는 하나도 쓸 줄 모르는 애라고! 게다가 지금은 옵스큐러스도 아니잖아.”
“티나, 걘 위험해.”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샘, 쟤는 그냥 기절한 애라고. 숨도 간신히 쉬고 있는 어린애야. 울워스빌딩을 부수지도 않았고, 우리 중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어.”
“하지만 공격할 가능성이 있지.”
“가능성이 있으면?”
티나가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오자 샘은 그녀의 기세에 눌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가능성만 있으면 그 자리에서 그냥 죽여도 돼?”
그녀의 말은 샘이 애써 한구석에 묻어뒀던 죄책감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샘은 옵스큐러스 사건 당시 그 현장에 있던 오러 중 한 명이었으며, 대통령의 명령으로 옵스큐러스를 사살한 오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공격마법을 정확히 쏘기 위해 거대한 검은 덩어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보았다.
검은 연기 속에서 고통에 울부짖는 소년의 모습을.
그건 옆에 있는 브래드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사회를 노출시켜 위험에 빠뜨리고, 그들의 법을 어겼으며, 노마지를 살해하기까지 한 괴물을 없애기 위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어떤 대의와 명분으로도 죽어가던 소년의 얼굴을 가릴 수 없었다.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도 끈질기게 쫓아오던, 그래서 애써 지켜야 하는 것들을 되뇌며 묻어놓았던 죄책감. 그 죄책감이 다시 현실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
결국 샘은 지팡이를 내렸다.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했지만 그가 지팡이를 내린 것만으로도 티나의 태도는 한층 누그러졌다.
“하지만 쟤를 풀어줄 수는 없어.”
“걱정 마. 나도 풀어주자는 건 아니야. 얘를 체포할 거야.”
그녀는 다시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샘은 티나의 어깨너머로 소년을 살폈다. 출혈도 없고, 눈에 보이는 상처도 없었지만 오러들에게 동시에 공격당했으니 속은 멀쩡하지 않을 터였다. 사실 살아있는 게 기적이었다.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티나가 말했다.
“우선 대통령께 보고하고, 병원으로 보내자.”
샘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도 범죄자를 잡아두기 위한 오러로서의 책임감 때문은 아니었다.
* * *
베어본 고아원 수색을 나갔던 오러들이 옵스큐러스의 숙주를 발견했다는 중대한 보고를 올렸을 때 피쿼리는 그보다 더 중대한 일 때문에 보고를 받지 못 했다.
그녀는 눈앞의 범죄자를 천천히 훑었다. 그의 손발에는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하는 저주가 걸린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고 구속구에 연결된 쇠사슬은 엇갈려서 벽에 박혀있다. 누더기 같은 죄수복을 입고 무릎을 꿇은 자세밖에 취할 수 없는데도 그는 마치 푹신한 침대에 누운 양 편안한 얼굴이었다.
유럽 각지에서 테러를 일으키며 마법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테러리스트는 유럽에서 약 5,000km 떨어진 뉴욕에서 체포되었다. 미합중국 마법의회는 그린델왈드를 체포하자마자 미국에 체류 중이던 각국의 마법부 대표들과 국제연맹에 바로 사실을 보고했다. 본래 마쿠자가 국제법령 위반을 방관했다는 의혹 때문에 열렸던 회의는 그린델왈드의 처분을 결정하는 회의로 바뀌었다.
뉴욕 고스트지는 그린델왈드를 체포하기까지의 과정과 뉴욕에 출현한 옵스큐러스의 존재, 미국 마법사회를 구한 천둥새와 뉴트 스캐맨더 사건을 단독으로 보도했다. 마쿠자에는 신출귀몰한 범죄자를 체포했다는 찬사와 오러국장이 바뀌는 동안에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다. 마쿠자는 모든 찬사와 비난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마쿠자의 침묵에 찬사와 비난은 모두 사라졌고, 그들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자신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범죄자가 어떤 잔혹한 형벌을 받게 될까. 전 세계의 마법사들이 뉴욕을 주목하는 이유였다.
피쿼리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각국 마법부와 언론에서 날아오는 서신에 일일이 답변해주며, 그린델왈드의 처분을 논의했던 제1차 국제연맹회의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고, 국제연맹의 요청으로 제2차 회의의 일정을 잡고, 옵스큐러스 사건의 사후 처리를 직접 지휘하고, 어수선한 미국 마법사회의 분위기를 정비하기 위해 마쿠자 내부를 점검하고, 미국 내의 언론을 중재시키고, 몇 가지 긴급명령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이 모든 사단을 일으킨 범죄자를 신문하는 일 또한 그녀의 몫이었다.
“오랜만이군요. 마담.”
제 집에 온 손님을 맞이하기라도 한 말투였다. 그린델왈드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피쿼리는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뒤로 오러 둘이 자리를 지켰고, 닫힌 문 밖에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오러 둘이 대기 중이었다.
그린델왈드가 세계각지에서 테러를 일으키며 마법사들을 공격하고 살해한 사실은 자명했다. 그 또한 자신이 한 일을 숨기는 위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의 업적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린델왈드의 목줄을 쥔 것이 마쿠자라고는 해도, 그가 벌인 일이 모든 마법사회를 위협한 만큼 그에 대한 처분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다뤄져야 했다. 피쿼리가 굳이 이 자를 만나러 지하 감옥으로 내려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퍼시벌 그레이브스는 어디 있지?”
물음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앞에 그레이브스가 나타났다.
“여기 있잖습니까.”
그레이브스의 얼굴에 절대 걸릴 리 없는 가증스러운 미소가 걸린다.
피쿼리의 뒤에 서있던 오러들이 재빨리 지팡이를 꺼내자 그린델왈드는 다시 모습을 바꿨다. 양손을 머리 옆으로 들며 순순히 응하겠다는 제스처를 보였으나 입에 걸린 미소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피쿼리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꿇은 건 오로지 몸뚱이뿐이다. 이 자에게는 진심으로 무릎 꿇고 참회할 생각도, 판사의 발끝에 입 맞추며 자비를 구할 생각도 없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움은 도리어 악랄하게 느껴졌다. 극악무도의 범죄자들만이 가진 모습이다. 수사관에게 이런 범죄자와의 기싸움은 흔한 일이었으나 피쿼리는 수사관이 아니었다. 그녀는 수사관들을 지휘하는 자였으며, 수사관들이 가져온 결과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순식간에 피곤이 밀려왔다. 피쿼리는 매일 같이 이런 범죄자들을 상대해왔을 그레이브스에게 약간의 존경심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알았다. 한 사회를 대표하는 자리를 맡고나서는 무모하게 덤비던 과거의 혈기도 사라졌다. 자신은 그린델왈드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고, 이 일의 적임자도 아니었다. 퍼시벌 그레이브스야말로 적임자였다. 그는 오러이면서 보안국의 국장이었고, 동시에 법률 강제집행부의 수장이기도 했다. 피쿼리에게 늘 최상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인재였다. 그러나 마땅히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지금 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그레이브스의 자리에 앉혔다가는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 뻔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그레이브스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를 찾아와야만 한다.
피쿼리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다시 물었다.
“퍼시벌 그레이브스는 어디 있지?”
그레이브스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실력자다. 그런 그레이브스도 쓰러트린 자에게 보통의 레질리먼시를 사용한들 효력이 있을까. 저주가 걸린 족쇄를 차고도 우스울 정도로 쉽게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이 극악의 실력자에게. 피쿼리는 뒤에 선 오러들에게 맡겨둔 베리타세룸을 떠올렸다. 누구든 마시면 비밀을 토해내고 마는 물약. 그건 그린델왈드에게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그러나 섣불리 그 물약을 쓸 수는 없었다.
그린델왈드는 제법 애처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나와 같은 어둠 속에 있지.”
“…….”
“그는 어둠 속에서 죽어가고 있어. 오, 불쌍한 퍼시벌.”
“…….”
“빨리 그를 구해주세요, 마담. 지금 같은 비상시에 그처럼 유능한 마법사를 잃어버린다면 미국 마법 사회에 너무나도 큰 손실일 테니까요.”
그리고 징그러운 미소.
피쿼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마쿠자의 법에 따라 당장 사형선고를 내리고 싶었지만 국제연맹이 시퍼렇게 눈을 뜬 와중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피쿼리가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어차피 사형당할 운명이다. 속으로 저주의 주문을 퍼붓던 피쿼리는 독방에서 나왔다. 뒤를 지키던 오러들도 그녀를 따랐다.
“안녕히 가십쇼. 마담.”
철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미소는 끈질기게 그녀를 쫓아왔다.
지상으로 올라온 피쿼리는 제 뒤를 따라오던 오러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지금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린델왈드가 단순히 그레이브스의 모습으로 변장했다고 해서, 그리고 그의 기억을 읽어 그대로 흉내 냈다고 해서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마쿠자의 모두를 속일 순 없었다. 이 울워스빌딩 안에 그린델왈드를 도와준 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단순히 그린델왈드의 목을 날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머리를 잡은 김에 팔과 다리도 모조리 잘라 불순한 세력을 미국에서 뿌리 뽑아야 했다.
그린델왈드의 말로 미루어 볼 때 퍼시벌 그레이브스는 아직 살아있다. 그레이브스의 구출은 최대한 비밀스럽게 이루어져야 했다. 안 그랬다간 그 징그러운 범죄자의 추종자들이 또 다시 그레이브스를 노릴지도 모른다.
피쿼리는 머릿속으로 함께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던 오러들 중 한 명을 불렀다. 그녀는 미리 그 오러에게 그녀의 집무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라 명령해두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오러는 이곳에 올 것이다.
곧 누군가 문을 노크하며 들어왔다.
“골드스틴.”
피쿼리의 부름에 그녀는 긴장감에 뻣뻣해진 목을 간신히 수그리며 인사했다. 지팡이를 들지 않아도, 심지어 상대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아도 모든 이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마녀. 그린델왈드 같은 자에게 보통의 레질리먼시는 통하지 않을 테지만 그와 필적하는 실력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너무 뛰어난 능력이 항상 그녀의 발목을 잡았으나 이번만은 날개가 되어줄 것이다.
“그레이브스가 있는 곳, 알아냈나?”
퀴니가 다시 한 번 뻣뻣한 목을 움직였다. 결 좋은 금발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렸다.
“네, 알아냈습니다.”
* * *
크레덴스에 대한 보고를 올린 지 6시간이 지나서야 승인이 내려왔다. 피쿼리는 크레덴스를 우선 병원으로 이송해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는 티나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며 아직 어수선한 분위기를 생각해 옵스큐러스의 숙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다른 이에게 알리지 말라고 덧붙였다. 승인이 내려오자마자 티나는 즉시 미국 마법사 병원에 협조를 요청했다.
병원 측은 정확한 설명도 없이 소년을 치료하되 격리시켜달라는 요청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마쿠자의 요청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으므로 고개만 끄덕였다. 오러들에게서는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으나 분위기상 소년이 위험한 범죄자일 거라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크레덴스는 오러 두 명이 교대로 병실 앞을 지키는 조건으로 입원할 수 있었고, 그는 병원 꼭대기 층의 병실을 배정받았다.
“더 궁금해 하면 날 잡아가려고 할 테니 한 가지만 부탁하죠.”
크레덴스의 치료를 마친 의사는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티나와 샘, 브래드에게 번갈아가며 삿대질을 했다.
“절대, 절대로 다른 환자들이 위험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주세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죠?”
“당연하죠, 선생님. 걱정 마세요.”
티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미소는 너무 어색해서 오히려 신뢰감을 떨어트렸지만 의사는 지적하지 않았다.
의사가 떠나고 나서 티나는 샘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인 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병실 앞을 지켰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병실 안의 소년에게 가있었으므로 시선도 자꾸 문 안쪽을 파고들려고 했다.
“들어가 봐.”
보다 못한 샘이 눈치를 주었다. 티나는 그에게 살짝 웃어 보이며 고맙다고 말한 뒤 재빨리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크레덴스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누워있었다. 넓지도 않은 침대가 넓어보일 정도였다. 티나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돌려 눕히고 굳은 것처럼 구부러진 팔과 다리를 펴주었다. 꽉 다물린 입술 사이로 희미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발견했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지만 크레덴스의 상태는 심각했다. 숨을 쉬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외상은 없었으나 모든 신체적 기능이 극도로 떨어진 상태였다. 가장 큰 문제는 심장박동이 너무 느리다는 것이었다. 내일 당장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라 했다. 크레덴스가 어떤 마법에 당했던 건지 물어보던 의사는 오러들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 애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도 애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의사는 무언가 변명하려던 오러들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크레덴스의 몸을 살피며 혼잣말로 계속 비난을 쏟아댔다. 이런저런 치료를 시도해볼 거지만 눈을 뜰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눈을 뜬다고 해도 예전처럼 멀쩡한 모습일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크레덴스는 좀 전보다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티나는 헝클어진 소년의 머리를 천천히 손으로 빗질해주었다.
안쓰러운 아이. 불쌍한 아이. 그래서 지나칠 수 없는 아이. 그녀의 기억 속에서 소년은 항상 울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맞으면서, 행인들에게 무시당하면서, 벽에 전단지를 붙이면서,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면서. 소년은 항상 울고 있었고 그녀는 우는 소년을 외면하지 못 했다.
마쿠자는 제2세일럼회를 감시했다. 마법사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마법사들을 내쫓겠다는 제2세일럼회의 일념은 터무니없고 맹랑했으나 음습하고 집요했다. 언제 마법사회에 대해 알아채고 공격해올지 모를 일이었다. 티나 또한 보안국의 명령으로 종종 제2세일럼회의 감시를 맡았었다. 집회를 보는 대부분의 노마지는 메리 루를 미친 여자정도로 생각했으나 집회 때마다 그녀에게 홀리는 자들이 분명 존재했다.
그날은 베어본 고아원에 거리의 고아들과 세일럼회의 추종자들이 모인 날이었다. 메리 루는 2층에서 1층을 내려다보며 열변을 토했고, 추종자들은 메리 루의 말이 끝날 때마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티나는 추종자들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 마법사들이 인류를 파멸시키려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연설을 끝낸 메리 루는 안쪽으로 사라졌고 추종자들이 하나 둘 고아원을 빠져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리 루의 뒤를 쫓은 그녀는 끔찍한 광경을 보았다.
한 소년이 무릎을 꿇은 채 손바닥만 들어 올려 어머니의 모진 매질을 받아내고 있었다. 벨트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날카로웠지만 소년은 입술을 꽉 문 채 울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간 지켜보면서 메리 루가 거리의 천사 같은 존재는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녀는 고아들에게 물처럼 묽은 스프만을 줬고, 종종 그녀의 자식들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중에서도 아들을 특히 미워했다. 메리 루는 툭하면 크레덴스에게 더럽다는 말과 괴물이라는 말을 일삼고, 자주 손을 올렸다. 잔혹한 폭력의 현장을 보고도 티나는 눈길을 돌려야했다. 그녀가 사는 세상은 소년이 사는 세상과 달랐으니까. 그러나 그 순간엔 더 이상 돌릴 수 없었다.
노마지에게 마법을 쓰는 건, 특히나 마법으로 노마지를 공격하는 건 중죄였다. 그녀는 자신이 메리 루에게 지팡이를 겨눈 순간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예상했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몸이 마비되는 주문을 맞은 메리 루는 그대로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아직 고아원을 빠져나가지 않은 추종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녀가 나타났다! 제2세일럼회가 옳았어!’
그들이 소리치거나 말거나 티나는 소년에게 달려갔다.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자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소년은 어떻게든 상처 난 팔을 감추려 애썼다. 제가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최대한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어깨를 쓸어주었다.
‘괜찮아,’
티나는 소년의 팔을 잡고 간단한 치료마법을 걸었다. 손바닥과 팔 안쪽에 붉게 얼룩진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이름이 뭐야? 난 포펜티나 골드스틴. 티나라고 불러.’
그는 여전히 티나를 쳐다보지 못 했지만 뚜렷하게 말했다.
‘크레덴스 베어본.’
오러직에서 좌천된 이후로 티나는 어떻게든 크레덴스를 메리 루에게서 빼내려고 했지만 노마지 세상의 아이에게 마법사인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세일럼회를 감시하는 업무에서 배제되었고, 한번만 더 제2세일럼회의 일에 끼어든다면 마쿠자에서 퇴출시키고 지팡이를 압수하겠다는 경고를 들었다. 깃을 잔뜩 세우고 마치 지나가는 사람인 척하며 크레덴스의 안색을 살피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잔뜩 헝클어졌던 머리는 가지런히 손질되었다. 티나는 크레덴스의 머리를 몇 번 토닥여준 뒤 눈을 감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때에도, 그리고 얼마 전에도 그녀는 크레덴스를 외면하지 못 했으나 지켜주지 못 했다.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됐다. 티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이 아이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아이를 감싼 어둠을 걷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퍼시벌 그레이브스는 어둠 속에 있다.
그는 깨어있기도 했고 잠들어있기도 했으나 그가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레이브스는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 스스로가 누워있는지, 앉아있는지, 서있는지조차 모른다. 추위와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고 불편하다거나 답답하다는 감각조차 없다. 하루가 시작되는 지점과 끝나는 순간도 알지 못 한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아주 끔찍하게도, 그의 의식만은 생생하게 존재한다. 그레이브스의 의식은 항상 그날의 기억에 머물러있다.
그날의 그레이브스는 평소와 같았다. 평소처럼 말끔히 차려입고,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미리 업무를 준비하고, 정확히 정각에 시작하는 회의에 들어갔다. 요 며칠 미지의 생물이 나타나 뉴욕을 헤집고 다녀 골칫덩이였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은 땅바닥을 파헤치고 벽을 부수고 높은 층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바람이었어요. 검은 바람이요. 검은 바람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고요!’
노마지들의 목격담도 이어졌다. 덕분에 보안국 오러들의 기억수정마법 실력만 나날이 늘어갔다. 노마지들은 아직까지 가스폭발 따위로 생각하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넘길 수는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밟히기 전에 꼬리를 잘라야 했다.
다섯 시간이 넘는 회의에도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책상에 넘쳐나도록 쌓인 보고서들이 보였다. 그레이브스의 이름 앞에 걸린 타이틀의 수만큼 그에겐 ‘검은 바람’을 쫓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넘쳤다. 여기저기서 올라온 보고서와 씨름을 하다보면 하루가 다 지나갔다. 다른 직원들이 전부 퇴근하고 나서야 그의 업무도 끝이 났다. 그레이브스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노마지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순간이동 했다.
흔히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는 불행의 징조가 찾아오곤 한다. 그날따라 기분이 이상하다던가, 자꾸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힌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날의 그레이브스는 너무나 평소와 같았기 때문에 집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순간까지 어떤 이상한 낌새도 느끼지 못 했다.
평소처럼 집 안으로 순간이동 한 그레이브스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자였으나 보안국장으로서 아주 잘 아는 얼굴이었다.
“만나서 반갑군, 미스터…….”
그레이브스는 남자가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남자는 지팡이도 들지 않은 맨손으로 그레이브스의 공격을 가볍게 쳐냈다.
“인사정도는 하는 게 어때?”
갤러트 그린델왈드.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유럽에 있다던 테러리스트가 왜 자신의 집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저 자를 붙잡고 나서 물어보면 될 일이다.
“미안하지만 난 반갑지 않아서 말이야.”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남자는 크게 웃었다. 동시에 그레이브스는 제가 아는 모든 공격주문을 외쳤다. 그린델왈드는 어느 새 지팡이를 꺼내들고 여유롭게 공격을 받아쳤다. 테이블이 부서지고 아끼던 소파가 찢어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레이브스와 남자의 마법이 거실 한가운데에서 부딪혔다. 그레이브스는 그린델왈드가 눈치 채지 못하게 손을 들어 그를 향해 기습적으로 소파를 날렸다. 순간이동으로 날아온 소파를 피한 남자는 기묘한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의 진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순간 그레이브스의 바로 앞으로 순간이동을 한 그린델왈드가 그의 얼굴에 공격을 퍼부었다. 제대로 방어를 하기도 전에 정통으로 맞은 그레이브스는 그대로 날아갔고 벽에 부딪혔다. 등에서 올라온 격통이 목을 타고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말끔했던 옷 위로 붉은 피가 쏟아졌다.
그레이브스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남자가 그를 짓눌렀다. 끝이다. 생각이 스치자마자 그레이브스는 남은 힘을 끌어 모아 마지막으로 그에게 저주를 날렸지만 그린델왈드는 가소롭다는 듯 저주를 피했다.
그린델왈드는 아직도 지팡이를 꼭 쥔 그레이브스의 오른손을 짓밟았다. 그럼에도 그레이브스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자 과장된 동작으로 지팡이를 밟아 부쉈다. 그와 동시에 바닥이 무너지고 그레이브스는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끝도 없는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에도 끔찍한 미소가 보인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분노와
“만나서 즐거웠네, 미스터 그레이브스.”
무력감.
* * *
그레이브스는 눈을 떴다. 갑자기 눈을 뜨는 바람에 눈동자가 타들어가는 듯 아팠다. 자는 동안 말라붙은 눈가가 뻑뻑했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과 소매로 연신 눈을 문질렀다. 오른쪽 눈가가 거친 무언가에 긁혀 화끈거렸다. 화끈거리는 감각에 그때까지도 꿈속을 헤매던 정신이 번뜩 돌아왔다. 그레이브스는 오른손을 내렸다. 무자비하게 밟혔던 손은 깔끔하게 치료되어 붕대가 감겨있었다. 그는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는 걸 확인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뜻대로 돌아간다.
햇빛을 받은 하얀 이불은 눈부셨고, 베개와 매트리스는 푹신했다. 그레이브스는 몸을 일으켰다. 철체 침대, 몇 개의 간이의자, 간소한 협탁과 그 위의 물병과 컵, 누군가 두고 간 꽃. 그레이브스는 붕대를 감지 않은 제 왼손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움직여보았다. 뼈마디에 기름칠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뻑뻑하긴 하지만 어쨌든 움직인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나흘 전에 구조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잠식된 감각들 중에서 가장 먼저 돌아온 건 고통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오른손에서 별안간 엄청난 통증이 올라왔다. 오른손을 시작으로 산발적으로 고통이 퍼졌다. 등이 찢어지고 뱃속이 꼬이고 다리가 뒤틀렸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비명을 질렀어도 듣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다시 정신을 잃었고 오래도록 잠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시야가 흐릿하게나마 돌아와 있었다. 그나마 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 그레이브스는 자신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구출되었다.
아직 말을 하거나 손을 움직일 수는 없어서 눈을 움직여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레이브스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본 간호사가 서둘러 달려 나가더니 조금 뒤에 의사와 함께 돌아왔다.
“제 말을 알아들으시겠어요? 제 말이 들리시면 눈을 두 번 깜박여주세요.”
그는 눈꺼풀에 모든 힘을 집중했고 느리게 눈을 두 번 깜박였다. 그레이브스의 움직임을 확인한 의사는 바로 말했다.
“지금부터 제가 질문할 건데 맞으면 눈을 한 번만, 아니라면 두 번 깜박여주세요. 아셨죠?”
그레이브스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의사는 그레이브스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시야가 제대로 보이는지, 냄새는 맡을 수 있는지, 손가락 끝이나 발가락 끝을 움직일 수 있는지, 다친 곳에서 아픔이 느껴지는지 등등. 의사는 그레이브스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들고 있는 진단서에 무언가를 마구 적었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작은 동작에도 엄청난 집중을 요했기 때문에 질문이 끝났을 때쯤엔 지쳐버렸다.
“몸이 너무 오랫동안 마비되어 있었어요. 근육, 신경, 장기……. 어쨌든 몸 전체가 다요. 환자분 몸은 이집트 미라가 다시 깨어난 거랑 똑같아요. 부상을 입고 치료도 없이 오랫동안 방치된 건 말할 것도 없이 심각하고요. 다행히 몸 전체가 마비되었던 거라 상처도 더 심해지진 않았어요. 그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요.”
의사가 말하는 동안 간호사가 열심히 그레이브스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마비된 몸을 풀어주는 약이에요.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마음을 차분히 가지세요. 전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으니 조급해 할 필요 없어요.”
그레이브스는 눈을 깜박여 대답하고자 했으나 그것마저도 너무 피곤해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하루가 지나자 시야가 완전히 돌아왔다. 밖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창문을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어제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그 상태로 한나절이 더 지나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훅 찔렀다. 다음 날에는 손가락 끝이 움직였다. 하루 종일 왼팔에 집중하자 저녁쯤에는 손목을 움직일 수 있었고, 다음날엔 팔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피쿼리와 퀴니, 애버나티가 찾아왔다. 단출한 병문안이었다.
“국장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국장님이 구출된 건 저희 셋밖에 모르거든요.”
그레이브스는 결코 직장 동료들이 병문안 좀 안 왔다고 상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 말은 할 수 없었고, 뛰어난 레질리먼스인 퀴니가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애버나티로부터 동정의 눈빛을 받아도 해명할 길이 없었다. 분명 제 생각을 읽었을 퀴니는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입이 열리거든 제일 먼저 골드스틴한테 감사인사를 전하도록 해.”
그레이브스가 인상을 쓰며 퀴니를 노려보자 피쿼리가 그녀를 변호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자네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니까.”
피쿼리의 변호에 퀴니가 좀 더 어깨를 폈다. 둥근 입꼬리가 자신만만하게 호선을 그렸다.
퍼시벌 그레이브스의 구출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극비로 이루어졌다. 구출 팀도 작전지휘를 맡은 피쿼리, 장소를 알아낸 퀴니와 퀴니가 추천한 애버나티, 이렇게 셋뿐이었다. 그레이브스는 뉴욕 근교에 위치한 빈 집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어떤 마법장치도 없었고, 때문에 마쿠자에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곳이었다. 피쿼리의 말대로 퀴니가 아니었더라면 그레이브스를 구출하는 데에 얼마나 더 시간이 걸렸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레이브스는 일단 마음으로라도 감사를 전했다. 예상 못한 다정한 인사에 퀴니가 “어머!” 하고 얼굴을 붉혔다.
‘도와준 김에 몇 가지만 더 도와줬으면 하는데.’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자신이 감금된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린델왈드가 어떤 식으로 미국 마법사회에 테러를 가했는지, 그로인해 기밀이 누출되는 등의 피해가 있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 그린델왈드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마쿠자의 현재 상황은 어떤지. 그레이브스는 퀴니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질문을 쏟아냈다.
“오, 미스터 그레이브스, 조금만 천천히 말해주실래요?”
피쿼리가 무슨 말이냐는 듯 퀴니를 바라보자 그녀는 순순히 그레이브스의 생각을 말로 옮겨주었다.
“궁금해 하는 게 많으세요. 마쿠자는 지금 어떻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그리고 또……. 뭐였죠?”
‘…그린델왈드는 어디 있는지.’
“네, 그린델왈드가 어디 있는지도요.”
피쿼리는 그레이브스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린델왈드는 체포됐고 그 일은 국제연맹으로 넘어갔으니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마쿠자가 지금 정신없긴 해도 병상에 누운 환자 손을 빌릴 정도로 절박한 건 아니야. 물론 자네가 회복된다고 해도 당장 업무에 복귀시켜주지도 않을 거고.”
“저, 마담, 미스터 그레이브스가 왜냐고 물어보시는데요.”
퀴니가 제가 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라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 텐데. 내가 괜히 자네가 구출된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나?”
피쿼리는 전에 없이 단호했다.
“그린델왈드는 체포되었지만 그 추종자들은 아직까지 건재해. 난 자네가 다시 그린델왈드의 표적이 되길 원하지 않아. 그 범죄자의 처분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회복하는 데에 집중하도록 해. 자네가 여기서 퇴원할 때쯤이면 이 상황도 정리돼있을 테니 그때 와서 보도록. 그때까진 밀린 휴가라도 쓰는 셈 치고 누워있으라고.”
그레이브스에겐 퀴니와 같은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었으나 읽지 않아도 그린델왈드를 체포한 마쿠자가 현재 얼마나 바쁠지 짐작할 수 있다. 피쿼리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런데도 피쿼리는 단호한 얼굴을 풀지 않았다.
퀴니를 통해 몇 번이나 반대의사를 표명하던 그레이브스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조급해하지마. 어차피 자네가 돌아오고 나면 이 순간이 그리울 만큼 일해야 할 테니까.”
애버나티는 피쿼리의 말에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더 이상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건 어린아이들 떼쓰는 것과 다를 바 없어서 그레이브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편하게 쉬게.”
그레이브스는 가볍게 목례하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했다. 그리고 퀴니만이 들을 수 있게 머릿속으로 강하게 외쳤다.
‘그린델왈드에 대한 보고서를 가져다줘.’
별안간 고함처럼 머릿속으로 흘러오는 생각에 놀란 퀴니가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 그를 돌아보았다. 그레이브스는 힘주어 다시 생각했다.
‘전부.’
사실상 그건 도박이었다. 임시이긴 했지만 퀴니는 현재 피쿼리의 직속 오러였다. 그런 그녀에게 직속 상사를, 그것도 대통령을 거스르라는 부탁을 들어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레이브스에게 다행이었던 건 퀴니는 정말 ‘임시’ 오러였기 때문에 다소 어설펐고, 그녀에게 있어서 피쿼리나 그레이브스나 똑같은 상관이라는 점이었다.
그날 뒤로 퀴니는 그레이브스에게 그린델왈드와 관련된 보고서를 조금씩 가져다주었다. 덕분에 그레이브스는 앉은 자리에서 기존의 자료는 물론 현재 새롭게 수사하며 추가된 자료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자신을 도와주는 마법사가 퀴니라는 것 또한 아직까지도 말을 할 수 없는 그레이브스에게는 행운이었다.
“며칠 전에 그린델왈드의 처분을 놓고 국제연맹회의가 열렸었어요. 하루 종일 회의했는데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고요.”
‘다음 회의는 언제지?’
”아직 정해지진 않았어요.”
‘그린델왈드는 지금 어디에 있나?’
“지하 감옥에 있어요.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요. 평소보다 보안을 강화했고, 오러 둘이 그자의 수감실 앞을 감시하고 있어요.”
‘마쿠자 내부에 있는 그린델왈드의 끄나풀을 색출하고 있다고 했지?’
“네.”
‘진전은 좀 있나?’
“아뇨. 아직까진 달리 수상한 자를 찾진 못 했습니다.”
‘수고했으니 이제 나가보게. 새로운 정보가 있다면 부탁하지.’
퀴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갔다.
그레이브스는 침대에 좀 더 편하게 기댔다. 제가 없는 동안 대강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파악했다. 그린델왈드가 저지른 짓들도.
그린델왈드는 밤에는 유럽에서 테러를 일으키고, 낮에는 미국에서 제 행세를 하며 마쿠자 내부에 숨어들었다. 마쿠자는 그린델왈드의 사상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기관이다. 모두가 국제비밀법령을 엄중하게 지키고 있지만 미국은 특히 심했다. 그들이 가진 유구한 역사는 그들을 가두었다. 그러면 마쿠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왔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마쿠자는 내부적으로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결국 마법사회가 노마지들에게 노출되긴 했지만 그건 그린델왈드의 계략과는 전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린델왈드는 미국에 아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왔다. 동시에 아주 은밀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그레이브스가 ‘미지의 생물’이라고 치부했던 것이 옵스큐러스라는 걸 그자는 알았고, 옵스큐러스를 손에 넣기 위해 머나먼 땅을 찾아온 것이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옵스큐러스를 손에 넣은 뒤 미국을 떠나려 했을 것이다.
그레이브스는 퀴니가 가져다준 보고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크레덴스 베어본.
메리 루 베어본의 양자로 제2세일럼회 소속.
특이사항: 없음.
옵스큐러스의 숙주.
오러들의 공격으로 옵스큐러스가 파괴되면서 사망.
보고서에 붙은 사진에는 음울한 표정을 한 소년이 있었다. 움츠러든 어깨와 잔뜩 수그린 고개, 빗겨간 시선. 제2세일럼회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몇 번 스쳤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담아두진 않았다.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제2세일럼회를 경계하며 감시했는데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니. 허탈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피쿼리는 칼같이 선을 그었지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햇살이 비치는 병실 안에서 의사들의 보살핌을 받는 지금도 그레이브스의 그림자에는 그린델왈드가 서려있었다. 강렬했던 꿈은 보통의 꿈처럼 햇빛에 말라 바스라지지 않았다. 지옥이 시작되었던 날은 오히려 선명하게 반복되었고, 눈을 뜨고 있는 이 순간에마저 그를 파고들었다. 지옥의 시작이자 그레이브스가 무언가를 해볼 수 있던 마지막 순간. 그리고 무참하게 실패한 순간.
처음에는 당연히 탈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전신이 마비되었지만 어쩐지 의식만은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지팡이가 없는 무언마법에도 익숙했으며 오러국장을 하며 이보다 더한 일을 겪어왔다. 여기서 나가게 되면 가장 먼저 그자의 지팡이를 빼앗고 팔을 으스러트리리라.
그러나 그는 그린델왈드의 팔을 으스러트리기는커녕 마비된 몸을 풀지도 못 했다. 자신이 아는 모든 주문을 사용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눈앞에 가증스러운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그레이브스는 냉정한 사람이었으므로 남들보다 좀 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도망칠 수 없다. 깨달은 뒤로 그는 그린델왈드를 저주했고, 자신의 의식만은 남겨둔 것을 저주했다. 왜 그린델왈드가 제 의식만은 살려뒀을까. 그레이브스는 항상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린델왈드를 처음 맞딱드린 날만을 그렸다. 그때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혹은 도망쳤더라면, 하다못해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라도 했다면.
그레이브스는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협박을 당하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험하게 다뤄진 적도 없었다. 그는 그저 굳어있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 한 채로. 그것이 잔인한 범죄자가 선택한 고문이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남자를 짓누르기 위한 방법. 그레이브스는 그곳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림자를 지워내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였다. 제 손으로 그 그림자의 기원을 뜯어내는 것. 복귀시켜주지 않을 생각이라면 복귀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쿠자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부러뜨린 이 손으로 그자의 사형을 집행할 것이다.
* * *
토비 브리튼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남자였다. 그의 꿈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세상을 담아내는 사진작가였다. 세상에 없는 단 하나의 사진을 찍고 싶었다. 꿈은 명확했지만 그의 시대는 꿈을 펼치기에 좋은 세상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 참여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 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의 집은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한 토비는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털어 카메라를 샀다. 마지막 오기였다. 꿈을 이루며 살 순 없지만 꿈의 근처에서 살고 싶었다. 다행히 투고한 사진이 운 좋게 눈에 띄어 그는 한 신문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찍고 싶었던 신비로움이나 아름다움을 담은 사진은 찍지 못 했다. 그의 피사체는 새로 문을 연 은행이나 이번 선거에 출마하는 의원들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비참해지지 않았던 건 그의 상사 덕분이었다. 그의 상사는 특종을 원했다. 특별하고,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없을 특종. 가끔씩은 엉뚱한 소리도 하곤 했는데 세상에 단 하나뿐인 피사체를 갈망하는 토비와 호흡이 잘 맞았다. 아직 그런 특종을 터뜨린 적도 없고, 신문사 내에서는 그의 상사와 그를 괴짜콤비 취급하긴 했지만. 만족한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썩 나쁘지도 않은 삶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이 되어서야 토비 브리튼의 삶에 그렇게 바라던 특별함이 다가왔다.
깊게 잠든 새벽이었다. 별안간 엄청난 폭죽소리가 들리더니 창문 쪽에서 번개 같은 섬광이 퍼졌다. 굉음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토비는 무슨 일인가 싶어 밖을 보았다가 굉음을 들었을 때보다 더 놀라 숨이 멈췄다. 짙은 새벽하늘에 하얀 연기가 드리워졌고, 연기는 정확하게 한 문장을 그려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토비는 버릇대로 카메라부터 가져왔다. 놀랍게도 그 연기는 토비가 허둥지둥 카메라를 가져올 동안에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연기는 그의 방 창문 바로 정면에 있었고, 토비는 뚜렷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는 사진을 찍자마자 요란하게 현상실로 뛰어 내려갔다.
너무나 마법 같은 일이라 사진에 담기지 못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사진에서도 연기로 만들어진 글자는 선명했다. 당장 상사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너무 이른 시각이지만, 사진을 보면 상사는 반길 것이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토비는 상사에게 전화를 하며 제 손에 든 사진을 다시 보았다.
‘DISSOULTION OF THE MACUSA
FOR THE GREATER GOOD’
* * *
번쩍이는 섬광 때문에 병실 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가 다시 어슴푸레한 새벽빛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놀라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살폈지만 크레덴스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최근 크레덴스의 유일한 즐거움은 새벽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병실 안을 떠다니는 일이었다. 그는 아주 작은 기체덩어리였다. 어디에도 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지만 그는 사방을 둘러볼 수 있었고 제 모습도 살펴볼 수 있었다. 자신은 새까만 연기 그 자체였다. 원한다면 이 방의 끝에서 끝까지 닿을 정도로 늘어날 수도, 아무도 보지 못 할 만큼 작아질 수도 있다. 비록 괴물의 모습이었지만.
공중을 부유한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동화책에서나 보던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 이런 걸까.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는 것보다도 이편이 더 좋았다. 크레덴스는 시야를 밑으로 내려 하얀 침대를 바라보았다. 아마 낮에는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저 밑에 누워있을 것이다. 때때로 의식이 돌아왔으나 반쯤 물에 잠긴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는 제 머리를 쓸어주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고,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으나 그것들도 크레덴스를 완전히 깨우지는 못 했다.
병실 안을 들락거리던 사람들은 밤이 되어야 모두 떠났다. 그때가 되어서야 크레덴스는 온전히 깨어났다. 그러나 몸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에겐 팔이나 다리, 얼굴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부유하는 연기덩어리였다.
검은 연기로 변한 제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눈앞에 아찔했다. 이 모습으로는 도와 달라 소리 지를 수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또 다시 공격받을 게 분명했다. 저에게 꽂히던 수십 개의 빛들을 기억한다. 살갗을 태우고 뼈를 뚫고 몸을 관통하던 빛들. 아마도 마법이었을 것들. 크레덴스는 그렇게 무서운 마법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가 아는 마법은 꽃을 피우고, 상처를 치료하고, 그리운 이를 부르는 힘이었다.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들이 마법이라면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제발 누군가가 발견하기 전에 원래대로 돌아가길. 빌고 또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순간 다시 의식이 없어진다. 한참 뒤에야 의식이 수면 밖으로 올라오면 자신에게 다시 몸이 돌아온 걸 느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고, 무언가가 목을 타고 넘어왔다. 그러나 의식이 있는 순간엔 언제나 까만 연기덩어리였다.
‘더러운 괴물!’
어머니, 아니, 메리 루는 저를 그렇게 불렀다. 그녀는 크레덴스에게 손찌검을 할 때마다 네가 더러운 괴물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한다고 했다. 어쩌면 어머니의 말이 맞을 지도 몰랐다. 벌을 받아서 이제껏 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제는 벌을 받지 못 하니 영원히 괴물이 된 걸지도. 더 이상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자신은 돌아갈 곳이 없으니 상관없었다. 집은 무너졌고, 여동생은 사라졌고, 어머니는 죽었다. 어디에도 저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일어나지 싶지 않아.
이 모습에 익숙해지면 병원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을 나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면 누구도 저를 해치지 않을 곳이 있을지 모른다. 크레덴스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난 적이 없지만 이 모습으로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영원히 괴물로 살아야할지도 모른다.
그때 갑자기 벌컥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크레덴스는 눈이 없지만 들어온 자와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이 시간에는 온 적이 없었는데. 그를 발견한 남자는 입을 쩍 벌리고 덜덜 떨다가 재빠르게 지팡이를 꺼냈다. 크레덴스는 저 작은 막대기를 기억한다.
“리덕토!”
남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팡이 끝에서 나온 하얀 마법은 크레덴스에게 명중했다. 그때와 똑같았다. 살이 타들어가고, 뼈가 뚫린다. 마법은 제 몸을 꿰뚫어버릴 것이다. 크레덴스는 사지가 찢겨져 나갔던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지팡이를 든 남자는 자신을 죽일 것이다. 시야가 점멸하던 순간에 느꼈던 공포가 밀려왔다. 크레덴스는 최대한 웅크리려 애썼다. 남자가 자신을 볼 수 없을 만큼.
그러나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남자가 손에 든 지팡이는 두 동강 나있었다. 남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이 모습은 분명 내 모습인데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까. 크레덴스는 혼란스러웠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아무도 날 볼 수 없지.
“크레덴스!”
한 여자가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크레덴스는 그녀를 알았다. 저 사람만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방안을 가득 채웠던 연기는 순식간에 작게 뭉쳤고, 사방의 벽을 부수며 돌아다니다가 벽을 뚫고 방을 빠져나갔다. 연기는 복도를 내달렸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모서리 벽이 부서졌다. 옵스큐러스를 발견한 간호사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신호탄으로 병원 전체에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크레덴스는 도망쳤다. 찾아야했다.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지팡이를 든 마법사가 없는 곳. 누구도 다치지 않고, 누구도 저를 공격하지 않는 곳.
아무도 없는 곳.
* * *
갑자기 요란한 굉음이 들리더니 무슨 일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이번엔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요란한 사이렌이 병원 전체에 울렸다.
사이렌 소리에 그레이브스는 반사적으로 침대 밖으로 나오려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아직 다리는 멀쩡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속으로 욕을 짓씹은 그는 마법으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삐거덕거리는 몸을 움직여 간신히 문고리를 붙잡았다.
복도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잠들었던 환자들은 모두 놀라 달려 나왔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환자들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의사와 경비원 몇 명이 계단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레이브스는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제치고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며 그들을 따라 올라갔다. 난간을 붙잡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데 그를 발견한 간호사가 붙잡았다.
“환자분! 여기는 저희가 해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병실에서 대기해주세요!”
그레이브스는 제 소속을 알리려고 입을 열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도 아직 못할뿐더러 그가 구출된 건 기밀사항이었다.
“소피아! 이쪽 좀 도와줘요!”
한 의사가 간호사를 향해 다급하게 외치고 반대편 복도로 달려갔다. 간호사는 의사가 가버린 복도와 그레이브스를 번갈아보더니 그를 꽉 붙잡고 말했다.
“꼭 병실로 돌아가셔야 돼요. 아셨죠?”
그레이브스는 간호사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가 사라지는 걸 확인한 그레이브스는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미리 도착해있던 의사와 경비원들이 복도에서 방어마법을 치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공격 자세를 취한 경비원들이 천천히 복도 끝으로 다가갔다. 복도의 막다른 벽에는 검은 연기덩어리가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듯 벽 여기저기에 흠집을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레이브스는 저 연기를 본 적 있었다. 그린델왈드에게 납치당해 감금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조사한 ‘미지의 생물’ 사건에서였다.
“안 돼요! 공격하지 마세요!”
위층 계단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며 내려왔다. 티나였다. 그녀는 연신 안 된다고 외쳤다. 그녀의 뒤로 한 의사가 허둥지둥 따라왔다. 티나는 의사와 경비원들을 밀치고 검은 연기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검은 연기가 요동쳤다. 그녀는 연기 쪽으로 두 손을 보여주며 제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었다.
“크레덴스, 괜찮아. 아무도 널 공격하지 않을 거야.”
불안하게 요동치던 연기가 움직임을 멈췄다. 티나는 뒤에 선 사람들에게도 지팡이를 내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누구도 지팡이를 내리지는 않았다. 티나를 따라왔던 의사가 지팡이를 내리라며 윽박을 지르자 그제야 다들 슬금슬금 지팡이를 내렸다.
“괜찮아. 병실로 돌아가자.”
그때 그레이브스를 밀치고 계단을 올라온 경비병이 연기를 발견하고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공격주문을 외쳤다. 공격은 애꿎은 벽에 구멍만 냈고, 간신히 진정시킨 검은 연기를 자극하는 꼴만 됐다. 티나의 말에 얌전해졌던 연기는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벽을 부수고 제 앞의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레이브스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흉포한 검은 연기 앞을 막아섰다.
“멈춰, 크레덴스!”
저도 모르게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목소리가 나온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전에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누구도 저지하지 못 했던 옵스큐러스가 그레이브스의 한 마디에 멈춰 섰다.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서 굳은 연기는 서서히 가라앉았고, 곧 하얀 옷을 입은 소년으로 변했다.
옵스큐러스의 공격으로 바닥에 쓰러졌던 티나와 의사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그레이브스는 제 앞에 쓰러진 소년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소년은 자고 있었다. 병원에서 일어난 소란과 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얼굴로.
티나는 좀 더 허리를 곧게 세워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의 상사는 사석에서는 제법 다정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티나가 그레이브스와 함께 있는 장소는 수사본부가 아닌 그가 입원한 병실이었지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결코 사적인 영역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사건이 수습고 일주일 만에 발견했다는 건가?”
“네. 그린델왈드와 옵스큐러스 사건이 마무리 지어지고 나서 바로 베어본 고아원을 수색했지만 당시에는 발견하지 못 했습니다. 이후에 노마지 경찰들의 수사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저를 비롯한 샘과 브래드가 크레덴스를 발견한 건 마지막으로 마법의 흔적을 지우러 갔던 때였습니다.”
보고하는 목소리에 긴장감이 잔뜩 어렸다. 침대 위의 간이협탁에는 보고서들과 신문들로 가득했다. 왼쪽에 쌓인 보고서들은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그레이브스의 얼굴 앞으로 이동했다가 그가 내용을 다 읽으면 오른쪽으로 이동해 다시 차곡차곡 쌓였다. 꼭 춤추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발견했을 때도 옵스큐러스인 상태였나?”
“아뇨. 그때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병원으로 옮긴 뒤에도 제가 하루에 한 번씩 확인했는데 옵스큐러스였던 적은 없었습니다.”
공중에 띄워진 크레덴스 베어본의 보고서 위에서 깃펜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깃펜은 티나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중이었다.
“그린델왈드는 이 애가 옵스큐러스라는 걸 알고 있었나?”
“그랬던 것 같습니다.”
순간 그레이브스의 앞에서 춤을 추던 보고서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그레이브스는 보고서에서 눈을 떼고 티나를 바라보았다.
“그랬던 것 같다?”
보안국 국장의 날카로운 눈빛에 티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침대 위의 환자라고 해도 그가 가진 본래의 위압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세한 건 저도 알지 못 합니다. 다만 사건 당시에 그린델왈드가 했던 말이나 옵스큐러스가 그자의 말을 듣는 것 같았던 모습을 볼 때 이전부터 아는 사이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추측은 수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지.”
그레이브스는 신문들로 눈을 돌렸다. 뉴욕 고스트지에는 오늘 새벽 들렸던 굉음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범죄자 신문을 전혀 하지 않았나?”
“그린델왈드에 대한 처분은 국제연맹에 일임되었으며 현재 마쿠자 수사국에는 신문 권한이 없습니다.”
“국제연맹회의라면 이미 열렸던 걸로 알고 있는데. 거기서도 옵스큐러스에 관한 언급은 없었던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국제연맹에서는 옵스큐러스의 숙주가 살아있다는 걸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옵스큐러스가 파괴된 현재로서 관련조사는 필요 없으며 판단했습니다. 마담께선 옵스큐러스에 대한 재판까지 국제연맹에 넘기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옵스큐러스 문제가 국제연맹으로 넘어가든, 마쿠자 내부에서 처리되든 결론은 같았다. 그린델왈드가 아니더라도 뉴욕의 마법사들은 충분히 폐쇄적이다. 그렇다고 국내에서 일어난 사건에까지 국제연맹에서 간섭하도록 둘 순 없었다.
“티나, 그린델왈드가 옵스큐러스의 숙주를 어떻게 대했는지 봤다고 했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린델왈드가 지팡이도 들지 않고 다가가서 설득하는 걸 보았습니다. 미스터 스캐맨더의 증언에 따르면 그자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가갔다고 하더군요.”
티나는 제가 말할 때마다 유려하게 춤추는 깃펜을 곁눈질했다. 제가 하는 말을 그대로 적고 있을 게 뻔했지만 보이지 않으니 영 꺼림칙했다.
그레이브스는 크레덴스의 보고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애를 신문한 적은 있나?”
“아뇨. 여기로 온 뒤에도 눈을 뜬 적이 없어서 구조된 이후로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레이브스의 질문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턱을 쓸며 사념에 잠겼고 그의 앞에서 멈춰있던 보고서들이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그레이브스의 태도 때문에 티나는 더 초조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대해 잘 알았다. 국제연맹회의가 끝나고 크레덴스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면 그에게 사형을 내리는 건 그레이브스가 될 것이다.
지금도 크레덴스의 안위는 오로지 그레이브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새벽에 벌어진 사건 때문에 병원에서는 당장 크레덴스를 퇴원시키겠다고 반발했다. 크레덴스의 담당의만은 아이의 편을 들어주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설득하기 힘들었다. 새벽의 소동을 본 환자들은 불안해했고, 병원은 환자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두어야 했다.
‘범죄자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괴물이라고는 안 했잖아요!’
그 애는 괴물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그들은 완고했다. 그런 병원 측을 설득한 건 그레이브스였다. 그는 며칠 만에 말문이 트인 탓에 목소리가 잠겨있었지만 크레덴스의 입원을 자신이 담보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전했다. 마쿠자 보안국장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병원에서는 한 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크레덴스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레이브스는 병원 측에 자신이 구조된 사실과 옵스큐러스의 출현에 대해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을 것을 약조 받고, 쓰러진 크레덴스를 본래의 병실로 옮겨뒀다.
사실 그레이브스가 크레덴스를 오늘이라도 마쿠자의 지하 감옥으로 이송한다 해도 티나로서는 막을 길이 없다. 그럴 만한 권리도, 명분도 없었다. 아직 완전히 낫지도 않은 아이를 그런 곳으로 보낼 순 없는데. 눈 앞의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크레덴스는 그전까지는 옵스큐러스로 변한 적이 없습니다. 브래드 말로는 그가 들어갔을 때 옵스큐러스를 발견해서 먼저 공격했다고 했습니다. 그 애가 먼저 공격한 게 아닙니다.”
춤을 추던 보고서들이 또 움직임을 멈췄다. 그레이브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티나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오러직에서 좌천됐을 때 공격했던 노마지가 제2세일럼회 총수였지?”
실수다. 그레이브스와 눈을 마주친 순간 생각했다. 오러국장인 그레이브스가 그 일을 모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치고 들어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 했다. 지금 그레이브스는 단순히 티나가 노마지를 공격했던 일에 대해 묻고 있는 게 아니다. 그때 일로 크레덴스를 알고 있는 게 아니냐는 물음. 수사관인 오러가 옵스큐러스의 숙주와 관련 있는 자라는 게 알려지면 이번 사건에서 배제될지도 몰랐다. 자신이 배제되면 크레덴스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티나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으나 그레이브스는 이미 답을 아는 듯했다. 조바심이 나 주먹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잘 됐군. 자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 * *
티나 골드스틴은 어릴 적부터 퀴니 골드스틴의 영웅이었다.
그녀의 언니는 어릴 때부터 유달리 의젓했다. 하나뿐인 인형을 두고 울며불며 싸우다가도 먼저 같이 인형을 가지고 놀자고 말하는 언니였다. 언니가 친구들과 함께 놀러나갈 때 저도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쓰면 함께 가자고 손을 잡아주었다. 언니가 일버르모니에 들어가자 헤어지기 싫다며 매달리던 동생에게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말해주었고,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주던 언니였다.
학교에서 그녀의 영웅은 더 빛났다. 교수들의 질문에 답하는 목소리엔 거침이 없었고, 뛰어난 마법적 재능으로 기숙사에서도 수석을 다투었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기숙사 반장도 했었다. 심보가 고약한 아이들이 무리지어 약한 아이를 괴롭힐 때마다 마법으로 그들을 날려버렸다. 감점을 당해 수석을 놓칠지언정 한 번도 그런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세상에 유일한 가족이 되었을 때 티나는 퀴니를 지탱해주는 단단한 기둥이었다. 자매가 부모를 잃었을 때 둘은 아직 일버르모니의 학생이었다. 티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퀴니는 졸업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은 상황이었다. 퀴니는 차갑게 식어버린 부모님을 앞에 두고 울기 바빴지만 티나는 슬픔에 잠겨있으면서도 빠져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후의 일들을 생각했다. 티나는 부모님의 장례식을 치르고 학교를 조기 졸업한 뒤 마쿠자에 오러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복지혜택을 신청한 덕에 생활비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었다. 덕분에 퀴니는 무사히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레질리먼시 때문에 퀴니는 원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야했다. 앞에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욕을 하는 작자들이나 저속한 생각만 가득한 버러지들이 너무 많았다. 아이들을 챙기는 천사 같은 고아원의 원장이 숨긴 본모습을 알았고, 겉만 번지르르하며 속은 비겁한 사기꾼들을 보았다. 능숙하게 음흉한 속을 감출 줄 아는 자도 그녀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겉모습과 마음이 일치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퀴니가 울며 떼를 쓸 때도 티나는 그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힘든 일이 있어도 슬퍼할지언정 누군가를 탓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했다. 신체적인 능력이나 마법적인 재능이 아니라 마음이 그랬다. 그녀는 정의롭고, 상냥하고, 다정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았고, 부당함에 꺾이지 않은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 퀴니의 안에서 티나는 빛나는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영웅과 같은 일을 하면서 퀴니는 영웅의 위상을 실감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견딘 거지?’
그렇게 동경하는 언니와 같은 일을 하게 된 건 좋았는데, 이놈의 일은 너무 힘들었다. 오러에게는 정확한 출퇴근 시간이 없다. 각자 소속된 부서가 있긴 하지만 필요하다면 수사국 오러도 보안국 일에 나서야 했다. 매일 보고서를 해치우고 퇴근하는데도 출근하면 어제 치운 만큼의 보고서가 또 쌓여있었다. 오늘만 해도 날이 바뀌고 나서야 간신히 집에 들어갔는데 해가 뜨자마자 또 연락을 받고 나가는 길이었다. 너무 바빠서 며칠째 제이콥네 가게에도 가지 못 했다.
일은 적응이 안 되는데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시기와 질투는 노골적이었다. 지팡이 관리 부서에서도 허드렛일이나 하던 마녀가 갑자기 대통령 직속 오러가 되었으니 그만큼 시선과 시기가 몰리는 건 당연했다.
‘오러 주제에 왜 이렇게 늦게 출근해? 하여간 낙하산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도대체 마담은 왜 저런 여자를 데리고 다니시는 거지?’
‘무슨 수를 쓴 거지? 돈을 준 건가? 아님 뒷거래? 빌어먹을 정부 놈들. 다 싹 없어져야 돼.’
당연하다고 견딜만한 건 아니었다. 직장에서는 레질리먼스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마쿠자 내에서도 그녀의 능력을 아는 자들은 드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면전에서 욕을 외치는 거겠지만. 지긋지긋했지만 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막는다고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임시로나마 오러가 된 건 바로 이 능력 때문이었으니까.
퀴니는 그전까지 한 번도 대통령 집무실 근처에도 가본 적 없었다. 대통령 집무실에 불려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뻣뻣하게 굳은 마녀에게 피쿼리는 더 엄청난 사실을 얘기했다.
‘마쿠자 내부에 스파이가 있어.’
피쿼리는 격렬하게 변하는 퀴니의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알고 있어. 그 능력으로 날 도와줬으면 해. 나는 내일부터 마쿠자 내부정비를 핑계 삼아 모든 부서의 마법사들을 만날 거야. 자네는 나랑 함께 다니면서 속으로 수상한 음모를 꾸미는 자를 찾아내면 돼. 할 수 있겠지?’
퀴니는 피쿼리의 말에 홀려 일단 고개를 끄덕이다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마담, 아무리 저라도 오클리먼시를 하면 읽을 수 없는데요.’
피쿼리가 퀴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평범한 직장에서 수시로 오클리먼시를 쓰고 있다는 거야말로 스파이라는 증거지.’
애초에 퀴니에게는 선택권이 없던 일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언니처럼 중요한 일을 하게 됐다는 사실에 한껏 고양되었다. 아무리 레질리먼스인 마녀라도 하루에 수십 명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버틸 만했다.
그린델왈드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도 막막했지만 무리 없이 해냈다. 그자를 실제로 눈앞에서 봤을 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아무리 잔혹한 범죄자라도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막을 순 없었다.
그레이브스의 구출작전에 있어서 애버나티를 추천한 것도 퀴니였다. 처음엔 당연히 티나를 추천했지만 마담은 그녀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로 생각난 것이 애버나티였는데, 그의 머릿속엔 마쿠자를 해할 만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퀴니에게 애버나티의 마음은 거의 열린 문이었으므로 확신할 수 있었다.
견딜 수 있고, 버틸 수 있다. 퀴니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머릿속에서 윙윙 울리는 말들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집무실 앞에 다다른 퀴니는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
퀴니의 사과는 채 이어지지 못했다. 호출이 있은 지 30분이나 지나 피쿼리의 표정이 안 좋을 건 예상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표정은 더 사나웠다. 옆에 선 애버나티가 쩔쩔 맸다. 퀴니는 마저 들어가지도 못 하고 문을 연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안절부절 눈치만 보는데도 피쿼리는 퀴니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책상에 널브러진 신문들에 꽂혀있었다.
“우리가 너무 안일했던 걸 인정해야겠군.”
애버나티가 빨리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하자 퀴니는 얼른 문을 닫고 허둥지둥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피쿼리는 퀴니를 힐끔 보더니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가끔씩 새가 날아다녔고 밑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안에서는 폭풍이 몰아치는데 밖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퀴니는 책상에 놓인 신문들을 찬찬히 살폈다. 뉴욕고스트지였다. ‘그린델왈드 사태, 과연 끝났는가.’라는 커다란 타이틀이 1면에 크게 박혔고, 타이틀 밑의 사진에는 ‘DISSOULTION OF THE MACUSA FOR THE GREATER GOOD’라고 적힌 연기가 뭉게뭉게 움직였다. 퀴니도 새벽에 있었던 요란한 폭죽놀이를 봤었다. 아침에 긴급 호출을 받았을 때도 이 일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퀴니가 애버나티에게 입모양으로 ‘이거 때문이야?’라고 물었다.
애버나티는 고개를 저으며 책상 위에 있던 다른 신문을 건넸다. 평소에는 전혀 볼 일이 없는 노마지의 신문이었다. 퀴니는 신문을 한 장 넘겨보았다. 3면에 뉴욕 고스트지와 똑같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연기가 움직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기사는 ‘마쿠자는 누구인가.’라는 타이틀 아래 마법사가 존재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오늘 일어난 일로 허황된 이야기를 꾸며낸 게 아니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누군가 마쿠자와 마법사회를 추적하고 있다.
놀란 퀴니가 고개를 들자 피쿼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좀 전보다 더 굳어있었다.
“지금 당장 오러들을 집결시켜. 이번 사태의 주동자를 찾아내야해. 골드스틴, 애버나티. 자네들은 오러들과 함께 움직이되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있는지 감시하도록. 국제연맹이 아직 뉴욕에 남아있어. 어떤 사고도 일어나선 안 돼.”
퀴니와 애버나티가 고개를 끄덕이고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피쿼리는 널브러진 신문들을 정리했다. 마음 같아서는 불에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녀는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사무실 바로 정면에 마법 노출 위험 표시기가 있다. 피쿼리는 지팡이를 휘둘러 바늘을 ‘비상사태’에 맞췄다.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고 로비에서 일을 보던 직원들은 빠르게 비상사태 매뉴얼대로 움직였다. 또 한 번의 위기였다.
* * *
“다행히 의식이 돌아왔어요. 호흡, 맥박, 혈압, 심장박동. 모두 안정적인 수치입니다. 그 난리를 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옵, 옵스, 뭐라고 했죠?”
“옵스큐러스요.”
“옵스큐러스로 변한 게 환자에겐 도움이 된 것 같더군요. 제가 그쪽은 전공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
“어쨌든 첫째도 안정, 둘째도 안정, 무조건 안정이 최우선입니다. 의식이 돌아왔다고 했지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에요. 아직 안정된 상태라고 볼 수 없어요. 또 충격을 받으면 의식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 옵스…뭐시기로 다시 변할지도 모르죠. 그렇게 되면 병원에서 쫓겨나도 나도 더 막아주지 못 해요. 그러니까 절대로, 환자분 자극하지 마세요. 아시겠죠?”
“네, 알겠습니다.”
티나는 그 뒤로도 크레덴스의 담당의로부터 10분간 더 잔소리를 들은 후에야 병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담당의는 크레덴스가 2주 만에 의식을 되찾은 것에 흥분해서 엄청 극성을 부렸다. 오러들이랑 같이 병실 앞을 지키다가 시도 때도 없이 들어가서 크레덴스를 체크하고 누구도 못 들어오게 기를 썼다. 티나도 담당의만큼 극성이었으면 극성이었지 덜 하지도 않아서 담당의의 잔소리에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둥글게 솟아오른 이불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로 깨어났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의식이 없는 아이는 이불 속에 숨지 않고 제가 눕혀 놓은 대로 얌전히 누워있었으니까.
“일어났니?”
티나는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어찌나 꽁꽁 감쌌는지 얼굴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내가 누군지 기억하니?”
“…….”
“처음에 너에게 내 소개를 할 때 포펜티나 골드스틴이라고 소개했었는데. 그리고 티나라고 부르라고 했지.”
“…….”
“나는 네 이름 기억해. 크레덴스 베어본, 맞지?”
이불 속에 숨은 아이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둥글게 움츠린 몸이 안쓰러워 토닥여주고 싶지만 갑작스러운 접촉은 아이를 놀라게 할지도 몰랐다. 쉽게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여긴 병원이야. 네가 많이 다쳐서 너희 집에 쓰러져 있는 걸 나랑 동료들이 발견해서 병원으로 데려왔어. 의사선생님이 크레덴스를 치료해주실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티나는 아이가 숨은 이불을 끌어내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안쪽에서 손으로 이불을 꽉 잡고 있는 게 보였다.
“새벽에 있었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제가 해놓고도 영 신빙성 없는 말이라 재빨리 덧붙였다.
“그때는… 음… 다들 조금 놀란 것뿐이야. 다신 널 다시는 공격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마. 나랑 의사선생님이 지켜줄 거니까.”
이런 어설픈 위로가 아이에게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티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브스의 부탁 아닌 부탁을 받고 크레덴스를 찾아왔지만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저를 믿지 못 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답을 얻어낼 수 있을까. 그전에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는 걸까. 막막하지만 티나로서는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크레덴스가 그린델왈드와 어디까지 연관된 건지 알아야만 그를 지킬 수 있다. 그레이브스가 왜 크레덴스에게 관심을 갖는 건진 몰라도 그보다 먼저 크레덴스에 대해 체크해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크레덴스가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그린델왈드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리고 이 사실을 그레이브스가 알게 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다. 먼저 대책을 세워야 한다.
“크레덴스, 너에게 물어볼 게 있어.”
티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말했다.
“네가 만났던 미스터 그레이브스에 관한 이야기야.”
그레이브스의 이름을 꺼냈을 뿐인데도 아이는 떨기 시작했다. 어찌나 애처롭게 떠는지 이불 밖으로도 떨림이 전해질 정도였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만났던 그 사람은 진짜 미스터 그레이브스가 아니야. 그는 그린델왈드라는 자인데 마법사들을 죽이고 다니는 나쁜 마법사야. 그 사람이 미스터 그레이브스로 변장해서 너에게 접근했고, 널 이용하려고 한 거야.”
티나는 크레덴스를 달래기 위해 그의 어깨쯤에 손을 올려 쓰다듬어주었다.
“혹시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니? 누구와 친해보였다든지, 너에게 뭔가 같이 하자고 했다거나.”
“……것도요.”
이불 안의 소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가라앉은 데다 오랜만에 말을 한 탓인지 중간 중간 끊겼고, 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티나는 크레덴스가 대답했다는 사실만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크레덴스가 몸을 움츠리자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앉았다.
“크레덴스, 다시 말해줄래?”
“…아무것도, 저한테 말해주지 않았어요. 아이를 찾아야한다는 말밖에는…….”
“아이? 어떤 아이?”
“엄청난 힘을 가진 아이가 있다고……. 찾아야한다고…….”
그린델왈드도 크레덴스가 옵스큐러스의 숙주라는 건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왜 크레덴스에게 그런 일을 맡겼는지는 모르지만, 크레덴스를 이용해 옵스큐러스의 숙주를 찾아내려고 했겠지. 확실한 건 그린델왈드는 크레덴스를 이용하려고만 했고, 크레덴스는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점이었다. 적어도 그린델왈드와 같이 사형당할 일은 없을 듯했다. 크레덴스에게는 더 무거운 문제가 남아있긴 했지만. 순간 티나의 머릿속에 뉴트가 스쳐지나갔다. 그라면 크레덴스를 도울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크레덴스, 널 도와줄 만한 사람을 알고 있어.”
“…….”
“조금만 기다려. 꼭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티나는 크레덴스에게 쉬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문을 닫을 때까지 크레덴스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못내 서운했지만 티나는 아이에게 시간을 좀 더 주기로 했다.
그레이브스에게는 크레덴스에게서 별다른 걸 알아낼 수 없었다고 둘러댔다. 사실이기도 했다. 그레이브스는 의외로 담담한 반응이었다.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하도록 하지.”
어떻게 해결하신다는 거죠? 하마터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갈 뻔했다. 또 조급하게 굴었다가 그레이브스의 눈 밖에 나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티나는 그레이브스가 제 여동생 같은 레질리먼스가 아닌 점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레이브스는 제 생각에 빠져있느라 티나의 미심쩍은 태도에 대해 전혀 알아채지 못 했다.
“그리고 애버나티를 불러줬으면 하는데.”
* * *
퍼시벌 그레이브스는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는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게 범죄자들로부터 자백이나 정보를 얻어내는 일이라면 지겨울 정도로 익숙했다. 그는 언제나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가 범죄자들을 다루는 방식을 두고 뒤에서 잡음이 나오긴 했으나 누구도 그레이브스에 대적하지 못했다. 대의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더라도 지켜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희생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는 은밀한 밤을 틈타 소년을 찾아왔다. 소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보고 나왔다던 티나의 말이 생각났다. 그레이브스는 둥글게 굽은 이불을 찬찬히 살폈다. 비정상적으로 움츠러든 모양새만으로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려졌다.
그레이브스는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크레덴스.”
애초에 자는 척을 할 생각은 없던 모양이다. 이불 안의 몸이 크게 움찔거리더니 얇은 이불 밖으로 다 보일 만큼 덜덜 떨기 시작했다. 퍽 안쓰러운 모양새였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티나처럼 아이를 봐줄 생각은 없었다.
그레이브스는 다소 강압적인 손길로 이불을 끌어내렸다.
“너에겐 내가 구면이겠구나.”
손에 꼭 붙들었던 이불을 놓친 소년의 망연한 얼굴이 보였다. 소년의 얼굴이 너무 엉망이라 조금 놀랐다. 언제부터 운건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고, 눈은 이미 퉁퉁 부어있었다. 소년은 그레이브스와 눈이 마주치자 어쩔 줄 모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잠깐 마주친 눈가가 발갰다.
그레이브스는 찬찬히 소년을 훑었다. 우스꽝스럽게 잘린 머리, 새하얗게 질린 얼굴, 이불 밖에서부터 예상했듯 움츠러들고 구부정한 어깨, 구명줄이라도 되듯 이불을 꼭 쥔 손. 티나는 제2세일럼회 총수를 공격했던 이유를, 그녀가 아들을 학대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불쌍한 아이. 불행하기만 했던 삶은 죽음으로 이어졌고 기적적으로 다시 시작점에 섰지만 그 시작점 또한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엾게도.
“나에겐 네가 초면이란다.”
“…….”
“네 이름이 크레덴스 맞니?”
소년은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은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티나가 다녀갔던 걸로 알고 있는데. 티나가 너에게 상황을 설명해줬다고 들었다. 내가 네가 만난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니?”
소년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보다도 힘없는 움직임이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만난 자는 마법사 사회에서도 악명 높은 범죄자야. 그는 국제비밀법령을 어기고 수많은 마법사들과 노마지들을 죽였지. 마법사들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세상까지 위협하는 테러리스트야. 지금은 마쿠자에 체포되었고 곧 사형당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남아있는 이상, 테러는 그치지 않을 거야. 그 추종자들을 잡아내면 물론 똑같이 사형에 처해야겠지. 그자들 또한 우리들의 법을 어겼거든.”
“…….”
“크레덴스, 네가 만약 그의 추종자라면 나는 너도 어쩔 수 없이 마쿠자에 넘길 수밖에 없어.”
“…….”
“말해보렴. 그에게 동조해서 이번 일을 벌인 거니?”
이미 아니라는 것은 안다. 보고서에는 옵스큐러스가 제 모습을 한 그린델왈드까지 공격했다고 적혀있었으니까. 이건 일종의 확인절차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아니라는 대답만으로도 넘어갈 수 있는 절차.
하지만 딱하게도 크레덴스에게는 이런 형식적인 절차조차 아찔한 듯했다. 크레덴스는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고개를 가로젓지도 않았다.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이던 동작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화석처럼 굳었다.
그레이브스는 혀를 찼다. 아무래도 아이는 이런 빈껍데기 협박조차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어떤 무기를 빼들지는 상대에 따라 다르다. 지금 그레이브스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는 협박이나 고문과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를 꾀어낼 수 있는 좀 더 달콤한 것.
“크레덴스, 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그자에게 동조해서 일부러 도시를 부수고 다닌 게 아니라면, 네가 그자에게 이용당한 거라면 그럴 일은 없어.”
“…….”
“대답해보렴. 그자와 같은 편이니?”
“아, 아니에요.”
처음으로 소년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대답은 다소 급했다.
“아니에요. 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전 몰랐어요.”
그레이브스는 짐짓 안도한 척했다.
“다행이구나. 네가 그 범죄자와 같은 편이 아니라서.”
그레이브스는 아이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그레이브스의 손을 본 크레덴스는 그를 피하려는 듯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미약했고 그 정도론 그레이브스의 손이 와 닿는 걸 피할 순 없었다.
크레덴스는 손이 닿는 걸 피하려했던 것치곤 그레이브스가 몇 번 쓰다듬어주자 얌전히 손길을 받았다.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에 목마른 아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크레덴스, 너에게 제안할 게 있다.”
그레이브스는 손을 떼고 소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그 일당들을 꼭 잡아야해. 그자에게 갚아야하는 빚이 있거든. 네가 그자의 추종자들이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지금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아는 대로 나에게 말해줬으면 하는데.”
어둠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은 흡사 짐승의 것과 같았다. 크레덴스는 그 눈과 마주할 수 없어서 자꾸 눈을 돌렸다.
“물론 맨입으로 도와달라는 건 아니야.”
그레이브스는 크레덴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방안에는 둘 뿐이므로 누가 엿들을 걱정은 없었다. 단지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였다.
“우선 네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줘야겠구나. 네 안에 있는 건 옵스큐러스라고 한다. 고대부터 존재하던 어둠의 힘을 가진 마법이지. 강력하고 파괴적인 힘이기 때문에 마법재판에 회부되면 사형을 피하기 어려울 거다.”
그의 예상대로 ‘사형’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크레덴스는 가엾게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조금 뒤에는 흐느끼는 소리까지 나왔다.
“네가 날 도와주면, 그의 추종자들을 잡는데 도움을 준 공으로 네가 사면 받을 수 있게 도와주마. 난 마쿠자에서 국장으로 일하고 있고, 너에게 그걸 해줄 수 있는 힘이 있어.”
마치 속삭이듯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인 양 가장하여 은밀하게 말했다.
“나를 도와주렴. 그러면 나도 너를 도와주마.”
그레이브스는 손을 들어 소년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자꾸 저를 피해 수그러드는 고개를 붙잡아 저를 보게 만들었다. 아까 잠깐 봤던 대로 소년의 눈가는 빨갛게 짓물렀다. 그레이브스는 엄지로 천천히 소년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소년의 눈동자는 떨렸지만 이내 눈을 감고 그레이브스의 손길에 저를 맡겼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소년이 자신의 손을 잡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갤러트 그린델왈드는 이 소년을 이용하려 했지만 결국 놓쳤다. 그러나 퍼시벌 그레이브스는 이 소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린델왈드가 놓친 이 소년은 그레이브스의 무기가 될 것이고, 그의 목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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