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14. 커크스팍 교류회에 가져간 회지.
스팍은 눈앞에 벌어진 비논리적인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엔터프라이즈호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성운 너머를 탐사하고 요크타운으로 돌아왔다.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엔터프라이즈호는 성공적으로 탐사를 끝냈으며 많은 성과와 진귀한 자료들과 새로운 파트너십을 확보했다. 새로운 발견에 고조된 건 함선의 대원들뿐만이 아니었다. 스타플릿 본부는 요크타운에서 함선의 재정비와 물자 보급을 마치는 대로 본부로 조속히 귀환하라는 명을 내렸다.
함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함장이라도 스타플릿 소속의 함선을 지휘하는 이상 스타플릿 본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함장에게는 본부의 명령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대원들이다. 엔터프라이즈호의 대원들은 98일 만에 함선에서 내렸고, 비록 인공적인 땅에 인공적인 중력이지만 우주선에서 내린다는 사실에 모두 흥분한 상태였다.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은 본부의 명령과 대원들의 사기를 적절히 고려하여, 기관실장인 스코티에게 최대한 함선 정비를 느긋하게 하라는 은밀한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엔터프라이즈에는 암묵적인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오랜만의 휴가였지만 스팍은 요크타운 본부에 항해 보고를 한 이후에는 아무런 일정이 없었다. 탐사 도중 아주 가끔씩 상륙휴가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든 저와 함께 있으려 애쓰던 그의 연인을 생각해 이번에도 일정을 비워두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커크는 급한 일이 있다며 스팍에게 모든 인수인계를 떠맡기고 제일 먼저 하선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새도 없었다.
커크가 스팍의 예측에서 벗어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한 함선의 함장이니만큼 부함장의 권한이 닿지 않은 일도 많았다. 그렇다고 해도 약간의 허전함이 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홀로 정거장에서 내려 막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누군가 불쑥 튀어나와 스팍의 앞을 가로막았다.
“미스터 스팍, 맞으시죠?”
옅은 모래바람과 닮은 진노란색의 피부와 허리까지 내려온 흰 머리카락, 에메랄드빛으로 꽉 찬 눈. 스트럼 행성의 주민이었다.
“그렇습니다.”
스팍은 그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똑바로 마주보았다. 스트럼 행성은 이름만 들어봤을 뿐, 실제로 행성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샤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여기서는 좀 그렇고…….”
샤르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정거장의 북적이는 인파를 둘러보았다.
일면식이 없는 자가 사적인 용무가 있다며 인파가 있는 곳을 피하려고 할 때 가장 합리적인 대처는 신분 및 소속, 용건을 정확하게 밝힐 것을 요구하고 그를 들어본 뒤에 자리를 옮기는 행동이 합당한지 판단하는 것이다. 실제로 스팍은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샤르의 입에서 ‘제임스 커크’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스팍은 그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그를 따라갔다.
논리적인 절차를 소홀히 한 결과가 이거였다.
스팍은 두 눈을 깜박였다. 눈앞으로 갑자기 쏟아졌던 물이 흘러내리면서 흐릿한 시야가 바로잡혔다. 울 것 같은 표정의 샤르가 컵이 부서져라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 눈에서 떨어진 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 턱 끝에 고여 있다 톡 하고 떨어졌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제임스가…….”
정거장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로 스팍을 데려온 샤르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제임스 커크와 무슨 사이냐고 캐물었다. 스팍은 초면에 사적인 관계에 대한 질문을 하는 이유를 물었으나 샤르는 얼른 대답이나 하라며 막무가내로 굴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스팍은 그는 공적으로는 자신이 소속된 함선의 함장이며, 사적으로는 연인 관계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샤르가 제 앞에 있던 물컵을 집어 들어 물을 뿌렸다.
벌칸에게 물을 뿌려봤자 아무런 데미지도 주지 못 한다. 샤르는 스팍을 공격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순간적으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걸로 보였다. 제임스 커크와 사적인 관계에 있는 자신을 향한 분노 반응,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표정, 그의 발언 등을 볼 때 샤르는 과거에 커크와 어떤 관계가 있던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상황 정리를 마친 스팍이 샤르에게 질문하기 위해 막 입을 연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벌컥 열렸다.
“스팍!!”
익숙한 목소리였다. 샤르와 스팍이 동시에 문 쪽을 돌아보았다. 이 사단의 원인이 거기 서있었다. 카페 안의 모두가 새로 등장한 인물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커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달음에 그들에게 달려왔다.
“제임스!”
샤르의 애타는 부름에도 커크는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스팍만을 살폈다.
“스팍, 괜찮아? 이게 대체 무슨…….”
커크는 스팍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피며 얼굴에 묻어 있는 물기를 손으로 연신 닦아냈다. 온 얼굴과 손길에 걱정이 가득하다. 손과 소매를 동원해 스팍의 얼굴을 닦아주던 커크는 샤르 쪽으로 홱 돌아보았다. 얼굴 가득 담겼던 애정 어린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 짓이야?”
매몰찬 눈초리와 날카로운 목소리에 샤르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제임스, 나는, 나는 그냥…….”
“너랑 나랑은 끝났어.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돼? 네가 아무리 이래도 난 너한테로 돌아갈 생각 없다고!”
순간 언성이 높아진 커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한숨과 함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제 그만해, 제발.”
한숨 섞인 말에는 냉정함과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들은 샤르는 울면서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관객들의 시선을 밖으로 뛰쳐나간 샤르를 쫓다가 그가 사라지자 다시 커크와 스팍에게로 돌아왔다. 커크는 샤르가 나가는 걸 보며 다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재빨리 다시 스팍을 살폈다.
“괜찮아?”
그때까지 말할 타이밍을 찾지 못 해 가만히 기다리던 스팍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짐.”
스팍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커크는 그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그는 오랜 경험으로, 지금부터 이 벌칸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굉장히 긴 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커크는 마음을 다지며 대답했다.
“응.”
그리고 그게 커크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아아아아아악!!!”
커크는 비명을 지르며 자기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맥코이는 친구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머리털을 다 뽑아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머리털을 다 뽑으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머리카락은 다시 나잖아.
카페 한복판에 난데없이 대자로 뻗어버린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은 카페 주인이 그가 입은 유니폼을 알아보고 요크타운 본부로 신고한 덕에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함장이 누군가에게 공격당해 쓰러졌다는 이야기에 헐레벌떡 달려온 CMO는 스캔 결과, 그가 아주 익숙하고도 기묘한 벌칸의 충격요법에 당했다는 걸 알아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함장에게서 벌칸에게 너브핀치를 맞기까지의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너넨 끝까지 지랄이다. 맥코이는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 업보다, 지미.”
커크는 한껏 움켜쥐었던 머리카락을 놓고 맥코이를 노려보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네 전 애인이 현 애인한테 물 뿌렸으면 뭐, 네 잘못 아니겠냐?”
맥코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커크는 억울해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물론 자신의 과거 연애사가 별로 깔끔하지 못하다는 건 인정했다. 클럽에서 애인 있는 상대 꼬시다가 이름 모를 촉수에 맞아본 적도 있고, 쌍둥이 자매랑 한 침대에 들어가 본 적도 있고, 며칠을 함께 뒹군 상대의 이름도 제대로 못 외운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관계를 정리할 때는 확실히 정리했다. 그는 맹세코 마음이 떠난 상대를 붙잡고 유야무야 시간을 끌며 낚시질을 하진 않았다. 커크가 샤르와 사귀었던 건 맞지만 고작 5개월 남짓한 시간이었으며, 그마저도 생도시절 때 헤어졌고, 엔터프라이즈호에 타고나서는 연락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개인패드에 샤르의 연락처 하나, 아니, 그와 관련된 사람의 연락처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가 스팍 앞에 나타나 행패를 부린단 말인가.
커크가 둘이 함께 있는 자리를 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사실 처음엔 샤르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누군데 스팍이랑 같이 있는 거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그런 태평한 생각이나 하는데 갑자기 샤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스팍에게 물을 뿌렸다. 순간 커크는 제가 찬물을 맞은 양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상황을 수습하고 스팍에게 설명하려 했지만 스팍은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커크가 억울함에 머리를 뜯고 맥코이에게 면박을 듣는 동안에도 커크의 패드는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메시지 계속 안 볼 거면 제발 그 망할 놈의 알람 좀 꺼!”
사실 패드는 커크가 깨어나기 전부터 계속 울려댔다.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이 요크타운 한복판에서 기절했다는 사실은 빠르게 퍼졌다. 스트럼 행성민과 함께 있던 벌칸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그런 봉변을 당했다는 것까지도. 대원들 중에 커크와 스팍이 사귀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소문이 으레 그렇듯 단편적인 뼈대 몇 개에 살이 붙기 시작했고, 다시 커크의 귀로 돌아왔을 때엔 그는 이미 우주로 분리수거해야 마땅할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함장님, 저… 소문이 진짠가요? 아니죠?]
[실망이에요 함장님!]
[부함장님한테 사과하세요!!]
처음에는 그런 게 아니라고 일일이 답장해주었지만 메시지는 점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였다. 커크는 함장으로서의 명예가 실추되는 걸 감수하며 과감히 모든 메시지를 무시했다.
그러나 지금 온 메시지는 무시할 수 없었다. 술루의 메시지였다.
[함장님, 프러포즈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지금 중요한 건 추잡한 소문이나 땅으로 추락하는 그의 명예가 아니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커크는 스팍에게 프러포즈 할 계획이었다.
미지의 우주로 향하는 항해를 시작하면서 둘 사이에 로맨틱한 감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미지의 우주 탐사보다 더 요란하고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그때마다 어떻게든 넘겨왔다. 처음에 야유를 보내던 동료들도 둘의 애정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무렵, 커크는 문득 생각했다. 단둘이 보내는 시간에도 밀린 보고서 얘기나 하는 이 벌칸과 평생을 함께 해야겠다고.
요크타운에서 프러포즈를 하고 지구에서 정식으로 결혼할 계획이었다. 결혼을 하더라도 둘이 지상직으로 바꿀 일은 없을 테니 신혼집은 필요 없을 것이다. 대신 우주로 나가기 전까지 스팍과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보낼 생각이었다. 아이오와를 가도 좋고, 뉴벌칸으로 가도 좋고, 전혀 상관없는 행성을 가도 좋을 것이다. 몇 달 전 휴식 차 들렀던 관광행성에서 그럴듯한 반지도 구입했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만을 그리던 커크는 존재조차 잊었던 옛날 애인이라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발목 잡혔다.
맥코이는 슬쩍 눈을 굴려 술루의 메시지를 읽었다.
“너 진짜 어쩔 거야?”
한 번 프러포즈한 경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술루와 함께 이번 프러포즈 프로젝트의 공동 기획을 맡았던 맥코이가 물었다.
“나도 몰라.”
커크는 새집이 된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않고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능하다면 땅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모르면 어쩔 건데. 프러포즈 때려 칠 거야?”
“미쳤어?”
“그럼 쫓아가서 얼른 빌어. 여기서 머리털 뽑고 있지 말고. 아니면 진짜 찔리는 거라도 있냐?”
“없거든? 아니, 진짜 걔랑은 졸업하고 연락한 적도 없어. 번호도 없다고! 얼굴도 까먹어서 한참 쳐다봤다고!”
“그럼 스팍한테 고대로 말하고 빌어.”
불치병 선고라도 받은 사람마냥 질린 커크와는 다르게 맥코이는 심드렁했다. 커크의 연애사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커크와 스팍의 연애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그에게 이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는 이런 익숙함 따위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논리쟁이 홉고블린이 아무 일도 아닌데 설마 기분 상했다고 널 안 받아주겠냐. 그랬으면 진작 헤어졌지. 뭐, 기분 상해서 널 카페 한복판에서 기절시켜놓긴 했지만.”
스팍은 논리와 이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벌칸이다. 그 사실 때문에 복장 터진 적도 많았지만, 그 망할 논리 덕분에 얼마나 많은 위기를 극복했던가. 남들 같았으면 욕과 주먹이 먼저 날아갈 만한 상황에서도 스팍은 동요하지 않았다. 커크가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주고, 그 설명이 논리적이라면 스팍은 언제나 납득했다. 커크가 마음 상해할 때도 스팍은 위로를 해주기보단 자신의 행동에 대한 논리적인 이유를 설명했다. 자긴 잘못한 거 없다는 듯한 태도에 열이 뻗치다가도 벌칸이 인간과 연애하느라 구구절절 변명하는 걸 보면 또 화가 풀리곤 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설명하면, 좀 힘들기야 하겠지만, 항상 그랬듯 잘 풀릴 것이다. 요크타운에서 머물 수 있는 날은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었다. 이상한 오해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스팍, 스팍 어디 있지? 본즈, 스팍 어딨는지 알아?”
커크는 꿈속을 헤매는 사람마냥 허둥거렸다. 아직 기절 후유증이 남아있나. 맥코이는 품속에 집어넣었던 트라이코더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한테 볼일 끝났으면 일하러 갔겠지. 그 일 중독자는.”
커크는 하선하기 전에 프러포즈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리고 스팍의 정신을 다른 데 돌릴 목적으로 그에게 모든 업무를 떠넘겼다. 아마 그는 충실하게 떠맡은 항해 보고와 잡무 처리를 하러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본부 쪽에 있겠지. 커크는 맥코이의 트라이코더가 여전히 울리고 있는 건 신경 안 쓰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야 임마 짐!!”
버릇처럼 그를 부르던 맥코이는 아직 울리고 있는 트라이코더를 그냥 꺼버렸다. 그가 보기에도 지금 급한 건 몸 상태가 아니라 다른 쪽이었으니까.
* * *
커크는 금방 스팍을 찾을 수 있었다. 항해 중이던 함선이 잠시 우주기지에 정박하는 경우, 해야 할 업무는 정해져 있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을 어기는 법이 없는 벌칸을 찾아내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스팍!”
급한 마음에 스팍을 보자마자 대뜸 소리쳐 부르고 붙잡았다. 평소 스팍은 이런 식으로 남들의 이목을 끄는 행위를 굉장히 불편해했으나 다행히 지금 복도에는 둘뿐이었다.
일단 찾아서 붙잡는 데는 성공했다. 이다음엔 어떻게 하지? 할 말은 생각해뒀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는 아니었다. 결국 커크는 스팍의 팔을 붙잡고 한참 허둥거리다 간신히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까……. 미안해.”
“어떤 사안에 대해서 사과하시는 겁니까?”
스팍은 정말로 커크가 왜 이렇게 허둥대며 사과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자기 손으로 눈앞의 연인을 기절시켰다는 사실은 싹 잊은 모양이었다.
싸우고 나서 화해하려고 건넨 미안하다는 말에 ‘뭘 잘못했는데?’ 따위의 물음은 2차전의 신호탄이다. 그러나 감정적인 종족들과 달리, 벌칸의 이런 물음은 ‘나 아직 화났음’이라는 뜻보다는 사안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한 목적이다. 알고 있다. 커크는 2차전으로 가지 않기 위해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거 말이야. 아까 카페에서.”
“샤르라는 자에게 이번 일을 사주하셨습니까?”
“뭐?”
어이없는 질문에 커크가 펄쩍 뛰어올랐다.
“내가 왜 그런 걸 사주하겠어? 애초에 엔터프라이즈호에 승선하고 나서 한 번도 걔랑 연락한 적도 없다고! 물론 아카데미 시절에 사귄 건 맞지만, 금방 헤어졌어. 나 지금 졸업한 지 몇 년 지났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커크는 팔을 역동적으로 흔들어대며 설명했다. 스팍은 커크의 설명을 들으면서 어떤 긍정적인 제스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단정히 뒷짐 진 자세를 유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짐, 이번 일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정리할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십 몇 년의 연애 경험을 걸고 확신할 수 있다. 이건 위험신호다. 커크는 필사적으로 ‘잠깐만, 아니, 그러니까, 일단.’ 같은 말들을 동원하며 스팍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잠시 시간을 주십쇼.”
커크도, 맥코이도 잊어버리고 있던 명제가 여기서 제기된다.
벌칸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 * *
맥코이는 업보라는 표현을 썼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샤르는 매력적이고 유쾌한 연인이었지만 집착적이고 쉽게 화를 냈다. 그 두 면모가 커크를 질리게 만들었다. 그는 항상 커크가 누구와 있는지, 어디에 갔는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처음에는 아카데미 생도가 아닌 샤르가 이곳 생활을 궁금해 하는 거라 생각했고, 나중에는 자신에 대한 애정이라고 치부했지만, 훈련 도중 연락을 받지 않았다고 길길이 날뛰는 걸 보고 자신의 가정이 죄다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커크가 식어 가면 식어갈수록 샤르의 집착은 점점 깊어졌다. 급기야는 맥코이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더 견딜 수 없던 커크는 샤르에게 이별을 고했다. 커크는 깔끔하게 정리했지만 둘 사이의 관계를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는 없었다. 헤어지자고 한 뒤에도 샤르는 두 번이나 아카데미를 찾아왔고, 수십 번 전화를 해왔다. 그는 애원하며 매달리다가도 그에게 욕을 퍼붓기도 했다. 커크는 그가 찾아올 수 없게 기숙사를 옮기고, 전화번호를 바꾸고, 샤르와 관련된 모든 이들과 연락을 끊었다.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부메랑은 너무 늦게 되돌아왔다.
어떻게 숙소로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멀어지는 스팍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던 게 선명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스팍은 없고 저는 침대 위에 누워 새하얀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꼭 술 마시고 필름이 끊긴 것 같았다.
옆으로 돌아눕자 주머니에 자리 잡은 묵직한 것이 허벅지를 눌렀다. 커크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고이고이 간직해온 작은 벨벳케이스를 꺼냈다. 요크타운에 내리고 난 뒤로 이 작은 상자를 몸에서 뗀 적이 없었다. 엄지로 푸른색의 고급스러운 벨벳을 쓸어보다가 천천히 케이스를 열었다. 은색의 심플한 링 위에 파란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스팍이 좋아하는 벌칸의 광물은 이제 구할 수 없으니 그 비슷한 거라도 찾기 위해 애썼던 날들이 떠올랐다.
설마 이대로 반지케이스도 꺼내보기 전에 차이는 건 아니겠지. 저의 수많은 연애 경험 중에서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사람치고 ‘나 이제 생각 끝났어!’라며 돌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직접적으로 이별을 말하기 껄끄러워 에두르는 말을 쓰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커크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아냐. 그냥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만 했잖아. 벌칸은 비유를 하지 않는다. 그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건 정말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논리적인 벌칸은 자기 입장을 정리하는 대로 자신에게 연락할 것이다. 커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이대로 답답함에 속 터지는 걸 감수하면서 말이다.
“미치겠네, 진짜!!”
침대에서 마구 구르다가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억울하고 서러워서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심혈을 기울여 고른 반지를 잃어버릴까봐 얼른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제 안의 모든 억울함을 담아 날뛰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갑갑한 건 마찬가지였다. 제 풀에 지쳐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동시에 배에서 무자비한 소리가 울렸다. 어이가 없었다. 이 짜증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배가 고픈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애써 생체 신호를 무시했으나 얼마 안 있어서 더 우렁찬 소리가 울렸으므로 저항하는 건 포기했다.
커크는 레플리케이터에 뜬 메뉴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대충 아무거나 눌렀다. 레플리케이터는 커크의 취향과는 매우 동떨어진 커리를 내놓았다. 이미 나온 음식을 버리기도 뭐해 그냥 커리를 퍼먹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향신료가 혀를 강타해서 절로 인상이 써졌다. 뇌는 음식이 공급되어 생각의 여지가 생기자 또 스팍 생각을 했다.
시간을 가지고 생각한다고 반드시 스팍의 기분이 풀리리라는 보장은 없다. 혹시 모르지.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돌이켜 볼수록 싸웠던 일이나 오해했던 일이나 제가 실수했던 일들만 차분하게 정리될지도. 그래서 이별을 결심했던 마음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버릴지도.
커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자리에 앉아서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범죄자마냥 벌벌 떨고 있을 순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팽개쳤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겉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센 뜀박질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위기를 함께 넘겨왔는가. 난생 처음 보는 외계인이 다짜고짜 자기를 결혼상대로 점찍고 납치했을 때, 스팍은 아무 언질 없이 사라졌다가 외계인과 결혼식에서 나타난 자신을 믿어준 상대였다. 그런 상대를 고작 이런 일로 놓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스팍은 제임스 커크가 결혼을 결심하게 만든 상대였다.
커크는 어디로 가야할지 정하지도 않고 달리면서 스팍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고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만 나왔다. 명백하게 저를 피하는 행동에 안 그래도 내면에서 떠돌던 불안감이 단숨에 머리끝까지 솟구쳐 올라왔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커크는 다시 전화를 거는 대신 패드를 마구 두드려 현재 엔터프라이즈호의 대원들에게 배정된 관사의 리스트를 띄웠다. 그리고 거기서 어렵지 않게 스팍의 이름과 현재 머물고 있는 숙소를 찾아냈다. 이 정도는 함장의 권한이다.
스팍은 커크가 있는 곳에서 두 블록 뒤에 있는 숙소에 있었다. 무작정 앞으로 뛰던 발걸음을 돌려 뒤를 돌아 다시 달렸다. 적색경보가 울릴 때만큼이나 이를 악물고 뛰었다. 스팍의 방은 610호였지만 커크는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단숨에 6층까지 뛰어 올라갔다. 610호 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있었다. 커크는 숨을 고를 생각도 안 하고 문부터 두드렸다.
“스팍! 스팍!!”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리고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불러봤지만 안쪽에선 묵묵부답이었다. 빈틈없이 꽉 닫혀있는 문이 꼭 스팍의 마음 같아서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제 얼굴은 꼴도 보기 싫은 걸까. 연락도 받지 않고, 찾아와도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을 정도로. 꼴사납게 울어버릴 것 같아 두 눈에 힘을 바짝 주었다.
“좋아. 지금 내가 보기 싫은 거면, 그냥 듣기라도 해줘.”
커크는 문에서 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우선, 미안해. 뭐가 미안하냐면 내 전 애인이란 애가 너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으니까. 그게 내가 직접적으로 관여한 일도 아니고, 난 정말 걔랑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네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거 자체가 나는 너무 미안해.”
심호흡을 가다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땀이 배어 나왔다. 방금 전의 뜀박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치만 스팍, 계속 말하는 거지만, 샤르랑은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 물론 예전에 사귄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정말 예전 일일 뿐이야. 지금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맹세해.”
맹세를 끝으로 커크는 숨을 골랐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1초가 하루 같이 흘렀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다 커크를 알아본 몇 명이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그렇게 6층에 머무는 모두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마지막 10호의 주민은 볼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하면 스팍도 기분을 풀 줄 알았다. 한달음에 달려와 절절하게 매달린다면 말이다. 설마 이렇게까지 개무시 당할 줄은 몰랐다.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고,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커크는 미동 없는 흰 문만 속절없이 바라보았다. 다시 손을 들어 올렸지만 두드리지 못 했다. 여기까지 와서 미련한 자존심이 남은 건 아니었다. 스팍이 이정도로 자기 의사를 확실히 표현해온다면, 이제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게 아닐까. 눈물이 났다. 그렇지만 정해진 답은 하나였다. 그는 결국 문으로부터 등을 돌려, 천천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아까 전엔 단숨에 올라왔던 그 계단이 끝도 없이 늘어졌다.
현관 밖의 풍경은 아까와 다를 바 없었다. 당연했다. 여기에 온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만에 제임스 커크의 세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바로 두 블록만 앞으로 가면 자신의 숙소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커크는 대신 더 뒤로 들어가 거리를 배회했다.
이대로 영영 얼굴을 안 본다고 하면 어쩌지. 아니, 어차피 엔터프라이즈호에 타서 지구로 돌아가려면 좋든 싫든 마주쳐야 한다. 스팍이 아무리 피해봤자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구질구질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커크는 이대로 스팍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안 된다면 그때라도 붙잡고,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고 이야기해야…….
상념에 빠져 정처 없이 걷고 있던 커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 끝에 카페에 나란히 앉아있는 샤르와 스팍이 걸렸다.
* * *
커크는 거의 반사적으로 카페에 뛰어 들어갔다. 왜 둘이 만나고 있는 건진 몰라도 여기서 더 꼬이는 건 사양이었다.
“스팍!”
갑작스레 등장한 커크를 보고 샤르와 스팍이 동시에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었다.
“짐?”
스팍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으나 커크만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게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커크는 오늘만 해도 벌써 열 번은 더 말한 것 같은 말이 튀어나갔다.
“스팍, 그러니까, 아니야!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제임스!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
샤르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 요란한 소리가 났다. 다행히 늦은 밤이라 카페 안엔 손님이 없었고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았다. 샤르는 여차하면 눈앞에 있는 컵이라도 집어던질 기세였다. 그러나 커크의 관심은 온통 얌전히 앉아있는 스팍에게로 쏠려있었다. 스팍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커크를 똑바로 마주보고 말했다.
“짐, 당신의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 말에 심장이 저 밑으로 뚝 떨어졌다.
“과거 기록과 주변의 증언을 통해 당신이 샤르와 아카데미 생도 시절 약 5개월간 연인 사이를 지속해왔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니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스팍, 그러니까, 그건.”
스팍은 손을 들어 커크의 변명을 잘랐다.
“하지만 연인관계를 종료하였다는 것과 이후에 실제로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는 짐의 발언 또한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역시 당시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주변의 증언과 과거 기록 등을 참조하였습니다.”
커크와 샤르는 지난번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스팍은 그들에게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이상의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여 ‘아무런 관계가 아니다.’라는 짐의 말은 현재의 시점에 국한하여 적용한다면 타당한 주장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기 할 말을 끝낸 스팍은 제 볼 일은 끝났다는 양 새침한 표정으로 제 앞에 놓인 물을 마셨다. 쏟아지는 벌칸의 말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샤르가 돌연 표정을 바꾸고 외쳤다.
“그럼 내가 지금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한테 행패부리고 있다는 거야?”
“비약적인 결론입니다만, 그렇게 볼 수 있죠.”
“멍청한 새끼! 지금 네 애인이라고 편드는 거야?!”
“이 사안과 저를 향한 인신공격 사이에 연관성을 알 수 없군요.”
샤르는 몇 번 더 욕을 퍼붓다가 스팍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발을 구르며 성질을 있는 대로 부렸다. 그러나 벌칸에게서 감정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건 실패했다. 샤르는 스팍에게 삿대질을 하다가 커크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소리친 뒤 그대로 카페 문을 박차고 나갔다. 커크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걸 황망히 지켜만 보다가 쓰러진 의자를 똑바로 세운 뒤 앉았다.
“생각해본다는 게 이거였어? 내 뒷조사?”
커크의 적나라한 단어 선택에 스팍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당신은 이번 일의 당사자이므로 당신의 주장만으로 이번 상황에 대한 전부를 판단할 순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전화도 안 받은 거야? 논리적인 판단을 하는 동안 날 완전히 차단하려고?”
스팍은 주머니에서 제 통신기를 꺼내 통화기록을 확인해보았다.
“죄송합니다. 제 나름의 조사를 마치고 난 후에는 샤르를 찾는 데에 신경을 쓰느라 전화가 온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너 그럼 계속 여기 있던 거야? 숙소에 간 적 없고?”
“요크타운에서 업무를 마치고 잠시 조사를 위해 짐의 생도시절을 알 만한 사람들을 만나본 뒤에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숙소에 들린 적은 없습니다.”
커크는 굳게 닫혀 열릴 생각이 없던 문을 떠올렸다. 문은 열릴 생각이 없던 게 아니라 열릴 수 없던 거였다. 열어줄 사람이 없으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노드라마 한 편을 찍고 온 셈이었다. 쪽팔려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짐, 안색이 안 좋습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스팍은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커크는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너 없는 곳에서 너를 향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펼치고 왔다고. 물벼락을 맞는 일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다. 커크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왜 샤르를 직접 만난 거야?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는 저에게 물리적인 해를 가하지 않습니다.”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해? 걔가 너한테 물 뿌린 거 기억 안 나?”
“물은 벌칸을 해하지 않습니다.”
커크는 스팍의 반듯한 앞머리나 치켜 올라간 눈썹이 아니라 이런 말을 태연자약하게 할 때마다 그가 정말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고를 가진 외계인이라는 걸 느꼈다. 물을 뿌리는 건 말이지,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라 정신적인 공격이라고. 물론 이렇게 말해봤자 벌칸은 감정적인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말할 게 뻔했다. 더 말해 뭐하겠는가.
“의심하던 건 풀렸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몰라서 물어보는 거 아니지?”
“짐, 저는 당신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스팍의 까만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이 커크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저를 두고 다른 이와 새로운 연인관계를 가졌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 생각을 객관적으로도 증명할 필요가 있었을 뿐입니다.”
커크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새빨개져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애초부터 모든 걱정이 헛짓이었다. 커크가 생각한 온갖 부정적인 망상들은 실제로는 뿌리조차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하루 종일 헛짓으로 고통 받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다.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리고 자료를 수집하는 건 별로 논리적인 사고 과정이 아닌데?”
스팍은 똑바로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사선으로 돌렸다.
“논증과정에 다소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내면을 조금씩 채우던 간지러운 마음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커크는 완전히 충동적으로 주머니에서 스팍에게 전해주지 못해 안달이던 케이스를 꺼냈다. 이성의 구석 한 편에서 지금은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는 외침이 울렸지만 커크를 막지는 못 했다.
“지금이 별로 좋은 타이밍 같진 않지만, 지금 꼭 말하고 싶어.”
커크는 스팍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케이스를 열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스팍은 커크와 케이스 안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번갈아보다가 한참 만에 말했다.
“인간은…… 청혼을 받아들일 때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커크는 웃으면서 스팍의 손을 잡고 직접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 * *
맥코이는 제 앞에서 실없이 웃는 커크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어제만 해도 차인 사람마냥 죽상을 하더니 오늘 다짜고짜 하는 말이 스팍에게 프러포즈했단다. 어제 그 난리는 어떻게 해결한 건지 궁금했지만 커크는 은근히 말을 돌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원들에게 퍼진 소문을 해명하려면 좋으나 싫으나 설명은 해야 했다. 맥코이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좋냐.”
“좋지.”
커크는 맥코이와 체콥, 우후라로부터 스팍이 샤르라는 자에 대해 질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 연인의 깜찍한 행동에 절로 웃음이 났다.
“그런 의미로 나 좀 도와줘라.”
“뭘?”
“뭐긴 뭐야. 제대로 프러포즈 해야지. 휴가가 얼마 안 남았다고! 그 안에 해치워야 돼!”
“뭔 소리야? 스팍이 반지 받았다며. 그럼 끝난 거지 뭘 또 해?”
“무드 없게 그게 뭐야. 평생에 한 번 하는 건데 제대로 해야지!”
과연 평생에 한 번만 할까. 맥코이는 지구로 돌아가면 결혼서약을 할 커플 앞에서 굳이 제 생각을 말하진 않았다. 커크는 다 먹었으면 일어나라며 맥코이를 잡아끌었다. 이 자식이 밥 사준다더니 다 꿍꿍이가 있었구만. 맥코이는 썩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간만에 얻은 휴가는 이 망할 커플들 때문에 다 날아가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