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5. 콜즈라 교류회에 가져간 회지
더 랍스터: 데이빗 x 시티 아일랜드: 비니
- 영화에서 설정을 그대로 쓴 부분이 있습니다.
각 작품의 내용 누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1.
데이빗은 생각했다.
‘이건 꿈이어야 돼.’
어젯밤, 그는 거실 한가운데서 다른 남자와 뒹구는 아내를 발견했다.
데이빗이 다니는 회사에는 꼭 금요일만 되면 급한 일이 생겼다. 협력 업체에서 그날 오후에 일거리를 몰아주거나,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기거나, 분명 위로 넘어갔던 설계도가 사라기도 했다. 그래서 금요일엔 항상 11시를 넘겨 귀가했다. 오늘처럼 9시 이전에 퇴근하는 날은 매우 드물었다. 데이빗은 집에 오기 전 아내에게 미리 연락해두는 편이 좋을까 고민했지만 귀찮은 마음에 하지 않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아니, 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행운이었다고 해야 할까.
벌거벗은 남녀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먼저 움직인 건 정장 쪽이었다. 데이빗은 방으로 들어가 큰 가방에 옷가지 몇 개와 속옷 몇 개를 챙겨 넣어 나왔다. 뒤늦게 그를 쫓아온 아내가 가방을 붙잡았다.
“허니, 제발, 내 말 좀 들어봐.”
데이빗이 현관문을 열 때 즈음엔 가운도 걸치지 않은 아내가 애처롭게 울며 그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지만 데이빗은 단호하게 뿌리치고 집을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랬나 싶었다. 그는 아내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다 들어주는 다정한 남편이었다.
단호하게 뿌리치고 나온 것까진 좋았는데 충동적으로 뛰쳐나온 터라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차로 동네를 두 바퀴 돌며 떠돌다가 시내에 있는 비즈니스호텔로 들어갔다. 데이빗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로 엎어졌다. 몇 시간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몇 벌 가져오지 못 했다. 상관없다. 집과 회사만 오가는데다 특별히 옷차림을 지적하는 회사도 아니었다. 옷 좀 며칠 돌려 입는다고 신경 쓰는 사람도 없을 거고. 영 껄끄럽다면 다시 집에 가서 가져오면 그만이다.
단호하게 뿌리치고 나왔으니 이혼해야겠지. 다른 남자의 허리에 감긴 다리를 보고나니 다시는 아내와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아내와는 지인의 소개로 만나 적당히 결혼한 사이였다. 그다지 사랑하지도 않았으니 그다지 배신감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데이빗이 그녀를 결혼상대로 택한 이유는 그녀가 저처럼 근시이기 때문이었다. 그 공통점이 감정의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람을 이어주고, 남들처럼 사랑해서 결혼 부부로 보이게 해줄 거라 믿었다. 이제 보니 완전히 틀린 판단이었지만.
아내의 태도로 봐서 합의이혼은 힘들지도 모른다. 법원까지 가야할까. 얼마나 걸릴까. 변호사를 찾아야할 텐데 마땅히 아는 사람이 없다. 아, 에단이 법무법인에서 일한다는 것 같은데 연락해보는 게 좋을까. 비용은 얼마나 들까. 언젠가 남편과 이혼소송 중이라 회사에 소문이 쫙 퍼졌던 샤론 그레그가 떠올랐다. 이젠 샤론 메이가 된 그녀. 그녀에게 조언을 얻어 볼까. 데이빗은 이 생각은 바로 지웠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괜히 말을 꺼냈다간 구설수에 오를 게 뻔했다. 회사에서까지 바람난 아내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샤론 그레그는 키가 작고 비쩍 말라 원래도 수수깡 같았는데 소송중이라 소문이 퍼졌을 때는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다. 단순히 살이 빠진 게 아니라 영혼이 빨린 모습이었다. 이제 저도 그렇게 될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데이빗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잘못은 아내가 했는데 왜 제가 골머리 썩어가며 고통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결심을 했다. 그는 샤워를 하고, 가지고 온 옷 중 가장 멀끔한 걸로 갈아입은 뒤, 시내에 있는 가장 큰 게이클럽을 찾아갔다. 굳이 게이클럽을 찾아간 건, 뭐, 엇나간 방향으로 솟구친 반항심 때문이었다. 아내를 만나기 전엔 남자와 만난 적도 있으니까 영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대학 때 딱 한 번 잔거긴 했지만.
억울함과 분노를 추진력으로 클럽에 입성한 것까진 좋았는데 춤추고 놀 만한 배짱까지는 없었다. 현란한 조명이 정신없이 움직였고, 음악은 너무 커서 고막을 찢을 기세였다. 어떤 사람은 상의까지 벗어던지고 열정적으로 춤을 췄고, 누구들은 원래 하나였던 덩어리마냥 들러붙어 몸을 흔들었고, 구석에선 커플들이 열정적으로 키스를 나눴다. 데이빗은 몇 번 몸을 흔드는 시늉을 하다가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 들어간 지 3분 만에 구석에서 술만 홀짝이며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죽였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은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제 나이대의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제가 고른 멀끔한 정장은 이 클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앉을 데도 없고, 피곤하고, 억울함도 분노도 사라졌다. 내 주제에 반항은 무슨. 얌전히 호텔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아저씨, 혼자 왔어요?”
한 청년이 그의 시야에 쑥 끼어들었다. 데이빗은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청년은 손에 든 담배를 입에 물고 턱 끝을 살짝 올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몸은 제법 자랐는데 얼굴이 하도 앳되어 보여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청년이었다. 그 나이에 어울리는 옅은 색의 셔츠 위로 형형색색의 조명이 쏟아졌다.
“혼자 왔냐니까요?”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청년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외쳐도 시끄러운 클럽 음악소리에 묻혀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어? 어어, 어.”
이런 얼빠진 대답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청년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 청량하고 말간 모습이 희뿌연 담배연기에 아스라이 가려지는데,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가까스로 차린 정신이 다시 얼얼해졌다.
“잘 됐네. 나도 오늘은 혼자거든요.”
청년은 데이빗 옆에 나란히 벽에 기대어 서서 클럽의 선곡센스가 형편없다거나 술맛은 그럭저럭 괜찮다는 말을 하다가
“오늘은 영 재미가 없네요.”
라며 떡밥을 던졌고, 데이빗은
“그럼 밖으로 나갈래요?”
라고 냉큼 떡밥을 물었다.
그 뒤로는 물 흐르는 듯 전개되었다. 제가 머무는 호텔로 청년을 데려왔고, 문 앞에서부터 서로에게 달라붙어 물고 빨고, 몇 시간 전 있었던 더러운 일을 날릴 듯 격렬하고 황홀한 밤을 보냈다. 청년의 몸은 적당히 덜 자랐고, 적당히 다부졌다. 도중에 키스를 하자 호흡이 달려 혀를 내빼고 숨을 몰아쉬는 모습은 데이빗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만약 대학 때 만난 남자가 오늘 만난 청년이었다면 아마 평생 게이로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늘 아침, 항상 맞춰둔 알람에 눈떠보니 청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락처라도 물어볼걸. 새벽에야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걸 물어볼 생각조차 못 했다. 게다가 청년도 좋아 죽는 게 얼굴로 다 보여서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질 줄 몰랐고.
아쉬움에 마른세수를 하며 일어나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안경을 집어 들었다. 안경을 쓰자 협탁 위에 지저분한 글씨체로 적힌 메모가 보였다.
‘다음에 또 만나고 싶죠?’
완전히 청년의 페이스에 휘말렸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장난질에 기꺼이 응해줄 아량까지 생겼다.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해오겠지. 데이빗은 그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젯밤 아내가 바람을 폈든 말든, 끝내주는 상대를 만났든 말든,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야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샤워하고 나와 옷을 꿰어 입던 데이빗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발견했다. 시내에 있는 햄버거 가게 영수증이었다.
‘치즈버거 5달러’
앳된 얼굴에 어울리는 메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 데이빗은 청년에게 단단히 홀린 게 분명했다. 그는 차를 몰고 회사가 아닌 영수증에 찍힌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느긋하게 기다려보겠다는 결심은 청년이 남긴 흔적만으로 쉽게 휘발되었다. 그는 반쯤 정신이 팔린 채 운전하면서도 회사에 연락해 몸이 아파 출근할 수 없다며 우는 연기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햄버거 가게는 시내의 한 하이스쿨 맞은편에 있었다. 데이빗은 도착하자마자 안으로 달려 들어가 아르바이트생들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그래도 좀 기대했는데, 어디에도 청년은 없었다.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아침을 대신할 햄버거와 콜라를 주문했다.
데이빗은 차안에서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학교와 편의점, 이 햄버거 가게를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햄버거 가게가 아니라면 편의점일까? 데이빗은 미어캣처럼 목을 빼고 편의점을 살펴보았지만 계산대에 서있는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다. 학교 선생님일까? 어제의 그 야살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너무 안 어울리지만, 게다가 얼굴은 선생이 아니라 학생에 가깝지만, 얼굴에 직업을 써놓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가 정말 선생님이라면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될 텐데.
혹시 이 가게는 그냥 지나가다가 들린 거 아닐까.
청년은 이 동네와는 전혀 관계없고, 자신은 지금 회사까지 빠지면서 쓸데없고 소득 없는 염탐에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닐까.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은 청년이 어디 사는지도, 뭘 하는 사람인지도, 심지어 이름조차도 모른다.
데이빗은 핸들에 머리를 처박았다. 조금 들떴다고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다니. 처음 결심처럼 느긋하게 기다렸어야 했다.
왜 그가 떨어뜨린 게 영수증인 걸까. 지갑 아니면 핸드폰, 하다못해 명함이기만 했어도 이런 고생까진 안 해도 됐을 텐데. 아니면 아예 아무런 정보도 없는 편이 좋았을걸. 그래도 이대로 돌아가면 제가 정말로 멍청한 짓거리를 한 게 될 터였다. 데이빗은 오기로 학교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슬슬 엉덩이가 배기고 허리가 아파왔다. 햄버거 가게 앞에 온종일 주차중인 차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인고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아이들이 건물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아득한 눈으로 아이들을 훑어보던 데이빗의 시선이 한 아이에게 꽂혔다. 버건디색 후드를 뒤집어 쓴 소년은 친구들과 치고 박더니 손을 흔들고 학교 앞에 주차된 빨간 소형차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차 안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못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다. 새벽까지 쳐다본 얼굴인데다, 온종일 그리던 얼굴이었으니까.
데이빗은 생각했다.
‘이건 꿈이어야 돼.’
그는 재빨리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 * *
“데이빗, 자기, 내가 잘못했어.”
데이빗은 정장 마이를 벗어 단정하게 걸어놓은 뒤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셨다. 아내는 데이빗이 움직일 때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며 열심히 빌었다.
“그 남자랑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 날 처음 만났다니까.”
데이빗이 집을 뛰쳐나온 지 나흘이 지났다. 그동안 데이빗은 변호사를 선임해 아내에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든지, 법정에 가든지 둘 중 하나를 정하라고 통보했다. 달리 할 말이 있으면 변호사를 통해 얘기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매일같이 데이빗을 찾아왔다. 변호사가 뒷말을 빼뜨렸을 리는 없으니 통보를 무시하고 멋대로 찾아오는 거였다. 오늘도 어떻게 들어온 건지 객실 문을 열어보니 떡하니 아내가 앉아 있었다.
“내가 더 잘할게, 허니, 제발. 응?”
다른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인 객기는 어디 갔는지 아내는 퍽 애절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왜 그날 처음 만났다는 남자와 거실 바닥에서 구르고 있었는지도 묻지 않았고, 그녀가 어떻게 제 방에 들어와 있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데이빗은 지금 아내보다 더 아찔한 상황에 처해버렸다.
데이빗 스스로를 위해 변명을 좀 하자면, 그날 그가 갔던 클럽은 엄연히 성인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어린 그를 보았어도, 얼굴이 앳되어 보인다 생각했지 정말로 어린애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굳이 따지자면 데이빗은 사기당한 피해자였다. 만연히 나이를 묻지 않았지만 누가 원나잇 자리에서 ‘죄송한데 그쪽이 너무 어려 보여서 그러는데 출생증명서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한단 말인가.
그러나 세상은 데이빗의 사정 따윈 전혀 고려해주지 않을 것이다. 무슨 사정이 있든 현재 데이빗은 하이스쿨도 졸업 안 한 어린애를 따먹은 파렴치한이었다. 그 어린애가 눈물 한 방울이라도 떨구면 천하의 개새끼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쯤 되니 저에게 다시 연락하겠다는 뉘앙스로 남긴 메모도 의심스럽다. 다음 번 그를 볼 때는 호텔이 아닌 경찰서일지도 몰랐다.
자괴감이 드는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직도 그 어린애에게 끌린다는 거였다. 옅은 색의 셔츠 위에 화려한 조명이 닿을 때마다 색이 변하던 모습이나 침대 위에 누워있을 때 보았던 덜 자란 몸의 굴곡, 담배를 물던 입술과 친구들과 투닥거리던 모습과 버건디 후드를 뒤집어 쓴 모습이 한꺼번에 섞여서 머릿속을 떠다녔다.
“……미스터?”
데이빗은 화들짝 놀라 제 앞에 앉은 변호사를 다시 바라보았다. 변호사는 띠꺼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제 얘기 듣고 계시죠?”
“네. 물론이죠.”
그는 얼른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지만 도중에 삑사리가 나서 변호사의 표정을 풀어주는 데는 실패했다.
“사실은 못 들었어요.”
“좋은 태도에요. 저한테는 뭐든지 솔직하게 말해주셔야 해요. 그래야 거기에 맞춰서 전략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변호사와 눈을 마주치며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는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내 분이 언제 또 찾아오셨죠?”
“어제 저녁에요.”
“아내 분 태도로 봐서는 합의이혼은 힘들겠어요. 저도 몇 번 만나봤지만, 아내 분을 설득하느니 살인마 잭의 무죄판결을 받아내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요.”
데이빗은 동의했다. 아내가 끈질기게 그를 붙잡고 매달리는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돈 때문이다. 아내는 현재 직장이 없다. 그리고 데이빗의 수입은 꽤 좋은 편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제가 번 돈으로 뭘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내는 자산관리를 잘하는 편이었고, 데이빗의 성격을 잘 알아 적정한 선에서만 사치를 즐겼다. 일하지 않고 마음대로 돈을 쓰는 평안함을 쉽게 포기하긴 어렵겠지.
“자녀가 없으시니 양육권 문제는 없어서 좋네요. 이혼소송의 대부분은 양육권 때문에 늘어지거든요.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빠른 시일 내에 끝날 겁니다. 대신 아내분에 대한 생활비 지원이나 재산분할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최대한 손해 보시는 일 없도록 해드리겠지만요.”
그러면서 변호사는 소장을 비롯한 각종 서류들을 보여주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설명해줬는데, 영 알아듣기 힘들었다. 데이빗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그에게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듣는 중이다.’라는 어필만 해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한 듯했다.
검토가 끝난 서류들을 서류봉투에 넣으며 변호사가 물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은 없으시죠?”
“네?”
데이빗은 설마 들킨 걸까 싶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변호사는 데이빗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서류봉투만 챙기며 여상히 말했다.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아내분이 불륜을 저질러서 이혼하는 거니까요. 소송중이라고 해도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저쪽에서 괜히 물고 늘어질 가능성이 커지거든요.”
순간 데이빗은 제가 어린애에게 속아서 경찰서로 잡혀갈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말해야하나 망설였다.
“지금 만나는 사람은 따로 없습니다.”
물론 그건 순간의 망설임이었다. 어린애랑 원나잇했다가 파렴치범으로 잡혀가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직접 털어놓을 만큼 절박하지도 않았고,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그의 안에서 포기해야하는 게 너무나 많았다.
변호사는 친근하게 데이빗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이혼하시고 나면 만날 시간은 차고 넘치실 테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데이빗은 정말로 조심하려고 노력했다. 변호사의 말을 무시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가 혼자 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저씨, 나 찾으러 우리 학교에 왔었죠?’
화면에 뜬 번호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습관대로 전화를 받은 걸 후회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순간,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학교’라는 말이 나온 순간 데이빗은 제 인생이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
“누구시죠?”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려고 최대한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데이빗의 수가 가소로울 만치 뻔히 보인다는 듯 웃었다.
‘모르는 척 할 거예요? 그땐 지금까지 해본 섹스 중에 내가 최고였다고 했으면서.’
데이빗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고 뒷목이 뻣뻣해졌다.
‘왜 모르는 척 해요? 내가 아직 학교 다닌다니까 현타 와요?’
“모른 척 한 게 아니라 정말 몰랐어요. 그날 뒤로 일주일은 더 지나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고요. 그리고 난 학교에 간 적 없어요.”
‘거짓말. 내가 봤는데. 아저씨 차 우리 학교 앞에 서있던 거.’
한숨과 함께 마지막 자존심으로 세웠던 거짓말에 대한 실토가 터졌다.
“……못 본 줄 알았는데.”
‘그러기엔 나 좀 봐달라고 길 한복판에 서있던데. 다음엔 좀 더 구석에 숨어 봐요. 학교 운동장 같은 곳에요.’
소년의 목소리는 아니꼬울 정도로 유쾌했다.
‘내일 4시에 학교로 나 데리러 와요.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거든요. 안 나오면 경찰서에서 만나고 싶은 거라고 생각할게요.’
소년은 일방적으로 제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전까지 복잡 미묘했던 소년에 대한 공상은 이제 절망적인 망상으로 바뀌었다. 망상은 데이빗을 지배했고, 회사에서도 정신 놓다가 상사에게 한소리 듣고 말았다. 어찌어찌 하루를 마무리하고 호텔에 돌아온 그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데이빗은 생각했다.
그 어린놈이 왜 저를 만나자고 하는 걸까.
경찰서를 운운하며 협박하는 걸 보니 돈을 뜯어낼 게 분명했다. 이런 사기극은 뉴스에서도 심심찮게 나온다. 나이를 속여서 한 번 자고, 미성년자 보호법 같은 걸 운운하며 돈을 뜯어내는. 뉴스에서 나올 땐 당하는 새끼가 한심한 거라 혀를 찼는데, 설마 그 한심한 새끼가 제가 될 줄이야.
아니, 돈을 요구하는 건 사실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어린놈에게 목줄을 잡혀버렸다는 것.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는 것. 기한도 없이 그에게 끌려다녀야 한다는 것.
게다가 만약 이 일이 아내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재산분할소송은 걷잡을 수 없이 불리해질게 뻔했다.
우울함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단 한 번의 일탈이 이런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줄 알았다면 그날 이 방으로 소년을 끌어들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충동적으로 클럽을 가지도, 아니, 호텔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후회만으로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고, 결국 데이빗은 다음날 소년을 데리러 가야했다.
소년은 그날 보았던 옅은 색 셔츠에 얼마 전 보았던 버건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꼭 저를 도발하는 것 같았다.
“맞춰서 왔네요?”
데이빗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매는 소년을 노려보았다.
“원하는 게 뭐예요?”
소년은 주머니에서 쪽지를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일단 여기로 가줘요.”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답답함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지만 지금 결정권이 쥔 사람은 데이빗이 아니라 소년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핸들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까 이름을 모르네. 이름이 뭐예요?”
“데이빗.”
“성은요?”
“…….”
“말해주기 싫어요? 좋아요, 뭐. 차차 알아 가면 되니까. 내 이름은 빈스 주니어 리조에요. 가족들은 비니라고 불러요.”
그 뒤로도 비니는 그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어디에 사냐, 무슨 일을 하냐,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 데이빗은 어떤 질문에도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운전만 했다. 이제 와서 챙기기도 민망하지만 그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주소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한적하다 못해 적적하기까지 한 시외의 섬이었다. 뉴욕에서 조금만 차를 타고 나왔다고 이런 휴양지 같은 곳이 나오다니. 뉴욕에서 꽤 오래 살았는데도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문을 열면 바다가 보이고 해변가가 펼쳐진 집이라. 영화에나 나올 법한 낭만이었다. 현실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자, 편한 데 앉아요.”
거실에 8명은 앉을 수 있는 식탁이 떡하니 놓여있었다. 비니는 데이빗만 거실에 남겨두고 쪼르르 부엌으로 들어갔다. 데이빗은 비니를 따라 슬쩍 부엌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보고 기함했다. 일반 가정집은 아닌 게 분명했다. 어떤 미친놈이 자기 집에 CCTV를 달아두겠냐고.
비니는 데이빗이 놀라든지 말든지 제 할 일 하느라 바빴다. 품에 소세지와 피클병을 껴안은 걸로도 모자라 양손에도 감자튀김 박스를 들고 나왔다. 넓은 식탁이 꽉 찼는데도 비니는 계속해서 부엌과 식탁을 오갔다.
“저, 저기…….”
“등갈비 좋아해요?”
“어?”
데이빗이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자 비니가 다시 말했다.
“세 번 구운 등갈비에요. 그릴 자국도 냈고. 지금까지 싫어했어도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요? 정 싫다면 감자튀김이랑 같이 튀긴 치킨이랑 페퍼로니 피자도 있어요.”
“아뇨. 등갈비로도 충분해요.”
“알았어요.”
대답은 그렇게 해놓고 비니는 등갈비와 치킨과 페퍼로니 피자를 꺼내왔다. 그는 데이빗의 맞은편에 앉아 손으로 어서 먹으라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안 먹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당연히 만나자마자 돈 얘기를 할 거라 생각했고, 얼마를 요구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입막음할 생각으로 현찰을 두둑이 챙겨왔는데. 돈 얘기는 꺼낼 타이밍도 없었다. 사람은 피가 바짝 마르는데 장난하자는 건지.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들어줬으면 하는 게 있다고 했잖아요.”
비니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씨익 웃었다.
“내가 전화할 때마다 나 만나러 와요. 와서 내가 해준 거 먹고. 그게 내가 원하는 거예요.”
데이빗이 전혀 상상해본 적 없던 조건이었다.
* * *
그날 이후로 데이빗은 일주일에 두 번, 많으면 네 번까지 비니의 호출을 받았다. 갈 때마다 휘황찬란한 식탁이 그를 반겨주었다. 심지어 메뉴도 매번 바뀌었다. 현란한 식단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기름지고 느끼하다는 점이었다. 뚱뚱한 사람은 항상 이런 음식을 좋아할 거라는 오해를 받는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
직장 동료들은 얼굴은 죽상이면서 피부는 반질반질하고 옆으로 무럭무럭 자라나는 데이빗을 보며 수군거렸다. 한 사람의 나쁜 소식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본인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만 회사 내에서 그의 아내가 바람이 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데이빗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간식거리를 그의 책상으로 밀어주었다. 여기서나 저기서나 불쾌하기 짝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과일 중에 뭐 좋아해요?”
눈앞의 초코케이크를 부모님의 원수라도 되듯 찔러대던 데이빗은 고개를 들어 마주앉은 상대를 노려보았다. 비니는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을 재촉했다. 이 모든 불쾌함의 원흉. 그를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비니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데이빗은 비니의 심기를 멋대로 거스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베리. 블루베리나 블랙베리 같은 거.”
“좋아요. 다음 주엔 블루베리 타르트 해줄 테니까 오늘처럼 끼적이면 안 돼요.”
비니는 포크로 데이빗의 케이크를 가리켰다. 데이빗은 그마저도 압박으로 느껴져 억지로 케이크를 한입 먹었다.
오늘도 식탁 위는 빈틈이 없이 빽빽했고, 데이빗은 그것들을 다 먹느라 곤욕스러웠다. 정작 식탁을 꽉 채운 주인공은 조금 끼적이다가 배부르다며 포크를 내려놓고 저만 쳐다보기 일쑤다. 눈빛만 보자면 등갈비가 아니라 제가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돈을 요구하는 것도, 잠자리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밥이나 많이 먹어달라니.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비니.”
“왜요?”
비니는 항상 저런 얼굴이었다. 저런 천진난만한 얼굴. 데이빗은 비니를 처음 봤던 날엔 분위기에 홀렸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 때 보았던 도발적인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 또래의 얼굴이었다. 말갛고 장난기가 그득 담긴 얼굴.
“설마 오늘도 아무 말 없이 이렇게 밥만 먹고 끝나는 건 아니죠?”
비니는 눈을 굴렸다. 도로록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밥만 먹고 끝나면 왜 안 되는 건데요?”
데이빗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되바라진 어린애를 만난 후로 한숨이 끊이는 날이 없었다. 비니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진짜 나한테 원하는 게 이거에요? 내가 비니가 차려준 밥을 먹고, 비니는 그걸 보고.”
“네.”
간단하고 명료한 대답이 그를 더 허탈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데이빗이 정말로 모르겠단 얼굴로 물었다.
“왜요?”
비니는 데이빗을 보며 웃었다. 처음 만난 그 때처럼.
“음식을 먹는 사람만큼 섹시한 사람은 없거든요. 침대 위에서보다 더요.”
2
“야, 나 게이였나봐.”
이 한 마디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운동장 끄트머리에 앉아 학교에서도 덩치 좀 있다는 녀석들이 날뛰는 걸 구경하던 비니가 대뜸 고백했다. 뜬금없는 고백에 서로를 마주보던 친구들의 첫 반응은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였다.
평소 같으면 지옥에서 올라온 주둥아리를 털어댔을 비니가 여전히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있자 친구들은 노선을 변경했다.
게이라면 꼭 가야하는 곳이 있다며 끌고 간 곳은 시내에 있는 클럽이었다. 게이만, 그리고 성인만 들어갈 수 있는 클럽. 성인만 출입가능하다고 입구에 대문짝만하게 써져 있었는데도 비니와 친구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경호원을 통과했다. 너무 자연스러운 입장에 충격 먹은 쪽은 비니였다.
“너네 나 빼고 다 게이였냐?”
“아니, 우린 아니고 쟤가.”
의기양양하게 앞서가던 존이 손을 흔들었다. 다른 애들은 게이는 아니지만 존을 따라 호기심에 몇 번 와봤단다. 하도 많이 왔더니 이제 경호원조차 신분증도 확인하지 않고 들여보내준다고.
어쨌든 들어왔으니 더 따지지 않고 놀았다. 친구들이 그 난리법석을 피우기에 좀 기대했지만, 게이클럽이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그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남자일 뿐이었다. 처음엔 친구들이랑 미친 듯이 춤추며 놀던 비니는 나중엔 시시해져서 뒤로 빠졌다. 지들끼리 무리지어서 춤추고 있으니 주변에서 다가오지 않았다. 뒤에서 보니 더 또라이 같았다.
비니는 모처럼 들어온 게이클럽에서 지겹게 보는 놈들이랑 새벽까지 춤추고 싶진 않았다. 괜찮은 사람 없나 클럽 안을 훑어보는데
그때 데이빗을 발견했다.
비니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는 입이 심심할 때도, 밥 먹은 뒤에 입가심으로도, 심심할 때도, 스트레스가 쌓일 때도 유용하지만 긴장을 풀 때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 담배의 힘으로 그는 제 이상형의 아저씨에게 말도 걸고, 꼬셔내고, 호텔까지 가서 역사를 이뤄냈다.
섹스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렇게 좋은 섹스는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었다. 묵직한 데이빗의 몸이 저를 짓누를 때마다 숨이 막히면서 동시에 흥분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의 목을 껴안고 더 끌어당기고 그의 허벅지에 제 다리를 감아 어떻게든 더 밀착하려고 애썼다.
생애 최고의 경험을 곱씹으며 꿈속을 날아다니던 비니를 깨운 건 징글맞게 울려대는 휴대폰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사랑하는 엄마의 우렁찬 욕지거리가 쏟아졌다. 이 정도는 말도 없이 외박했을 때부터 예상했다.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데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지붕에 거꾸로 매달아 버리겠단 으름장에 어쩔 수 없이 데이빗을 두고 나와야했다. 아쉬운 대로 그의 휴대폰으로 제 쪽에 전화를 걸어 연락처를 알아내는 걸로 만족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한 발짝 내딛자마자 전화로 들었던 욕을 똑같이 다시 들어야 했다. 비니는 얼른 데니스에게로 도망갔다. 게다가 꼭 말해줘야 하는 것도 있고.
“데니스, 들어봐요! 새벽에 내가 뭘 했는지 알아요?”
가엾은 데니스는 빈스 리조의 이웃집에 산다는 이유로 그의 아들이 오늘 새벽까지 체험한 끝내주게 황홀한 밤에 대해 들어야만 했다.
데니스는 30분을 쉬지 않고 떠드는 비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비니, 비니, 그만. 이 이상의 정보는 사양이야.”
“왜요.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나랑 자지도 않은 남자의 거기 크기까지는 알고 싶지 않거든.”
비니는 입을 샐쭉대며 치즈볼을 집어먹었다. 치즈볼 통을 꼭 끌어안고 입을 삐죽이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데니스는 저에게 성인클럽에 들어가 처음 보는 남자랑 원나잇을 하고 왔다는 이 당돌한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성인만 들어갈 수 있는 클럽이었으면 그 남잔 너보다 나이 많을 거 아냐.”
“어, 음, 그럴걸요?”
“대학생이야?”
“그건 확실히 아니에요.”
“그럼 30대?”
“…….”
“비니, 그 이상은 안 돼.”
“아무튼 50대는 아니에요. 대충 보니까 우리 아빠랑 비슷해보였는데, 모르죠. 엄청난 동안일 수도…….”
데니스는 멈출 생각이 없는 재앙의 주둥아리를 제 손으로 직접 닫았다.
“비니, 헤이, 꼬마야. 너 아직 학교도 졸업 안 했거든?”
“1년만 있으면 졸업하는데요.”
그녀의 손에 눌려 웅얼거리는 소리였지만 뜻은 아주 확실히 전달되었다.
“내가 말실수를 했구나. 졸업을 해도 안 돼.”
비니는 온 힘을 실어 데니스의 손을 입에서 떼어냈다.
“스무 살 정도 차이나는 게 뭐가 어때서요? 할리우드 보면 잘만 사귀고 결혼하잖아요.”
“첫째로 넌 할리우드 배우도 아니고, 두 번째로 30살에 50대를 만나는 거랑 10대에 40대를 만나는 거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단다.”
“내가 30살이 됐을 때 또 이상형을 만난다는 법도 없잖아요?”
“네 속을 빼먹을지도 모르는 파렴치한 아저씨보다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
파렴치한?
아래로 축 쳐진 눈썹과 말할 때마다 씰룩이는 콧수염, 덩달아 오르락내리락하는 볼 살을 본다면 데니스는 절대 파렴치한이란 말을 쓸 수 없을 것이다.
“별로 속을 빼먹게 생기진 않았는데.”
“비니, 말 돌리지마.”
데니스는 비니의 어깨를 꽉 쥐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만약 네가 쉐릴이랑 헤어져서 홧김에 게이가 되고 아무나 만나는 거라면 난 절대 반대야.”
비니는 제 어깨에서 데니스의 손을 치워내려 했으나 비리비리한 비니가 데니스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치워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쉐릴이랑은 잘 지낸다고요.”
사귀다가 헤어졌는데 아직도 학교에서 인사하고 지낼 정도면 잘 지내고 있는 거 아닌가.
쉐릴은 몇 달 전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비니에게 이별을 고했다. 방학 동안에는 친척집에 가있어야 한다는 그녀는 방학 내도록 연락이 없었다. 개학하고 학교에서 겨우 만났더니만 대뜸 헤어지자 선언했다. 몇 달 새에 아주 늘씬해진 모습으로 말이다. 친척집에서 채식주의자인 남자를 만났다나 어쨌다나. 속으로는 싸대기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보내줬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데 바닷가 너머로 해지는 풍경이 어찌나 처량하던지. 수백 번은 본 광경인데도 눈물이 났다. 그렇지만 참았다.
“정말 아니야?”
비니가 고개를 세 번 끄덕이고 나서야 데니스는 비니를 놓아주었다.
“못 만나게 하면 몰래 만날 거지?”
“당연하죠.”
“좋아. 그럴 거면 차라리 우리 집에서 만나. 어차피 몇 달 동안은 밤늦게 들어오니까.”
“그래도 돼요?”
“그래. 네가 다른 집 침대에서 나이 먹은 아저씨랑 뒹구는 상상을 하느니 우리 집에서 밥 차려주는 상상을 하는 게 훨씬 낫겠어.”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얻은 기회인데 데이빗은 제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대할 때마다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 뭘 해줘도 시큰둥. 크게 기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눈썹은 8시 20분이었고 한 번도 올라올 생각을 안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데이빗이 만족스럽게 웃는 걸 볼 수 있을까.
보통 연애에 관한 조언은 친구들에게 구한다지만 비니는 그럴 수도 없었다.
“너네 아버지는 뭐 좋아하시냐?”
비니의 물음에 존이 썩은 표정을 지었다.
“너 씨발 설마 우리 아빠를 노리는 건 아니지?”
존의 대답에 비니도 그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미쳤냐? 지랄하지 마.”
그나마 존의 아버지가 데이빗이랑 비슷한 체형에 비슷한 연령대라서 물어본 건데 괜히 더러운 소리만 들었다.
데이빗한테 직접 물어봐봤자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할 게 뻔했다. 아무리 뭘 먹고 싶냐고 물어도 대꾸도 안 하고, 좋아하는 음식도 끈덕지게 캐물어야 간신히 대답해주는 사람이었다. 여태 성도 안 가르쳐 주는데 뭐. 그럴 거면서 왜 꼬박꼬박 연락은 받고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는 실패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오늘도 데이빗은 2시간이나 걸려 완성한 초코케이크를 박살내고 있었다. 케이크 만드는 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데!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과일 중에 뭐 좋아해요?”
눈앞의 케이크가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되는 듯 난도질하던 데이빗은 포크질을 멈췄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비니가 못 참을 것 같다고 느낄 때쯤에야 입을 열었다.
“베리. 블루베리나 블랙베리 같은 거요.”
“좋아요. 다음 주엔 블루베리 타르트 해둘 테니까 오늘처럼 끼적이면 안 돼요.”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이며 초코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그래도 데이빗이 먹는 걸 보는 건 좋았다. 그가 입을 벌려 음식을 넣고, 턱을 움직이며 천천히 음식을 짓이기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에 뱃속이 찌르르 울렸다. 씨발 존나 좋아!
* * *
오늘도 데니스에게 허락받고 룰루랄라 데이빗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다는 짧고 냉담한 대답만 돌아왔다. 이전에도 제 제안을 거절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오늘은 괜히 더 기분이 나빴다. 심란한 맘에 집으로 곧장 가지도 못하고 하릴없이 시내만 돌아다니고 있었다.
확 그냥 경찰서에 꼰질러 버릴까보다. 비니는 눈에 거슬리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물론 진짜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도 데이빗에게 경찰서 어쩌고 했지만 비니가 경찰서로 달려가는 순간 그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배우 빈스 리조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뜰 게 뻔했다. 비니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가죽이 벗겨진 채로 교도소에 들어가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냥 가벼운 투정이다.
길에 버려진 돌멩이나 깡통을 걸리는 대로 걷어차던 비니는 우연히, 정말로 우연히 카페에 앉아있는 데이빗을 발견했다. 맞은편에는 웬 여자가 앉아있었는데 유리창 너머로 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여자는 거의 울기 직전인데 반해 데이빗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여자가 온 얼굴로 애원할 동안 평안하게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비니는 저 얼굴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크게 웃지도, 크게 화내지도, 크게 당황하지도 않는 한결 같은 얼굴은 제 감정을 빨아들인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결국 데이빗의 얼굴을 견디지 못한 여자가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긴 금발이 흩날리는데 꼭 슬픈 멜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여자가 카페에서 나오자 비니는 재빨리 카페 안으로 들어가 데이빗 앞에 앉았다.
“생각보다 무섭네요, 아저씨.”
데이빗은 비니의 등장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하겠지. 비니는 그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여자가 남기고 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반쯤 얼음이 녹아 영 미적지근한 맛이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지나가다가 봤어요.”
“…….”
“진짜에요. 내가 아저씨 위치추적이나 하는 변태로 보여요?”
“…….”
“그렇게 보이면 어쩔 수 없고요.”
비니는 커피를 마시는 대신 빨대를 휘휘 저어 남은 얼음들을 마저 녹이는 데 집중했다.
“아까 그 여자는 누구에요? 분위기 장난 아니던데.”
“부인이요.”
비니가 놀라 손짓을 멈췄지만 이번에는 데이빗이 그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커피를 마셨다.
부인이 있었단 말이야? 부인이 있는데 왜 내가 부를 때마다 나온 거야? 아니지, 애초에 부인이 있었으면 게이클럽 같은 데 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위장결혼이라도 한 거야? 헐, 나 그럼 불륜 저지른 거야? 감옥 가나? 낸들 게이클럽에 온 아저씨가 부인이 있을 줄 알았나. 남편도 아니고. 근데,
“근데 왜 싸웠어요?”
비니는 머릿속에서 떠돌던 질문 중 가장 마지막으로 떠오른 질문만 입 밖으로 꺼냈다.
“이혼소송 중이니까요.”
아오씨, 깜짝이야. 그제야 바짝 굳었던 어깨에 힘이 풀어졌다. 비니는 의자에 기대 축 늘어졌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나 아저씨가 부인이랑 위장결혼하고 게이클럽 오는 쓰레기인 줄 알았어요.”
“……그런 건 솔직하게 말 안 해줘도 돼요.”
“오늘 시간 없다고 한 것도 그 소송 때문이에요?”
“반쯤은 그렇죠.”
“반?”
“원래 살던 집에서 나와서 이제부터 혼자 살 집을 알아봐야하거든요.”
뭐야, 결국엔 아무 문제없는 거잖아. 신난 비니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테이블에 바짝 기대 최대한 데이빗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사 가면 나 집에 초대해줘요.”
“네?”
“아저씨 집에서 요리해주는 게 꿈이었거든요.”
데이빗은 조금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만으로는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불만이 있는 건지, 불만이 없는 건지. 싫은 건지, 마냥 싫지만은 않은 건지. 그렇지만 비니는 제 소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했다.
* * *
2주 뒤에 데이빗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사가 끝났다며 주말에 놀러오라 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니는 복도를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소리 지르다가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데니스에게로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너 그 아저씨한테 진심이었구나?”
혼자 신나게 떠들던 비니는 구워놓은 스테이크가 살아났다는 말이라도 들은 표정이 되었다.
“참 빨리도 물어보네요.”
데니스는 높은 소리로 웃었다.
“몇 번 만나면 안 만날 줄 알았지. 나이차이가 나도 너무 나잖아. 네 말대로 40대는 돼 보이던데 그런 아저씨랑 네가 얼마나 가겠어.”
“데이빗 본 적 있어요?”
“직접 본 건 아니지만 화면 너머로는 봤지.”
데니스는 부엌 천장을 가리켰다. 비니의 시선도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간다. 천장에는 방범센터에나 있을 법한 CCTV가 붙어있다. 그녀의 클럽에 가입하면 24시간동안 그녀의 부엌을 라이브로 볼 수 있다. 데이빗은 몇 번인가 제가 음식을 나르는 걸 돕기 위해 부엌을 오간 적이 있다.
비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의 데니스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날 감시했어요?”
“내가 왜 우리 집을 빌려줬겠어? 네가 서른 살 차이나는 남자랑 만나겠다는데 이정도 방범장치는 있어야지.”
데니스는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비니는 데니스를 졸졸 쫓아가며 사람이 기분이 더러우면서 동시에 감동받을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데이빗이 저한테 허튼 짓 한 적이 없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교도소에 보낼 뻔했다.
“그 남자 집에 간다는 상황도 썩 내키진 않지만…….”
데니스는 비니에게 피클 통과 채소와 소시지를 안겨주었다.
“그래. 네 말대로 사랑에 나이가 어디 있겠어. 이사람 저사람 만나보는 거지.”
네가 말린다고 들을 애도 아니고. 데니스는 그저 비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만 했다.
데니스는 자신의 방관이 비니에게 얼마나 큰 위력을 가지는지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쉽게 ‘한 번 만나보는 것도 좋지.’ 같은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비니는 내일이라도 당장 결혼하라는 허락을 받은 사람마냥 촐싹거리며 데이빗을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비니는 인사를 하자마자 집주인이 집으로 안내하기도 전에 냅다 부엌으로 돌진했다. 그의 첫 타겟은 당연히 냉장고였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텅텅 비어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득 차있었다. 마트는 안 가도 되려나. 비니는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생선이 세 마리 있고, 조개랑 칵테일새우도 있었다. 야채도 가득했고, 가장 윗칸에는 제과점에서 포장해온 작은 상자도 있었다.
데이빗이 저를 쫓아 부엌으로 들어오자 냉장고에 처박았던 고개를 홱 들었다.
“고기가 하나도 없네요.”
“내가 일부러 안 사왔으니까요.”
비니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마트부터 갔다 와요. 여기서 제일 가까운 마트가 어디에요?”
“일부러 안 사왔다니까요.”
데이빗은 ‘일부러’에 좀 더 힘을 주며 말했다.
“고기 말고 생선이 먹고 싶어요.”
“생선이요?
“생선 요리는 못 해요?”
못 할 리가. 1년 가까이 데니스의 이웃으로 살면서 그녀의 조수노릇을 해온 비니가 고작 생선요리 하나 모를 리가. 기껏해야 굽거나 찌는 정도긴 하지만. 그리고 제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캐물었을 때를 빼고는 데이빗이 먼저 메뉴를 얘기한 건 처음이었다. 데이빗이! 먼저! 얘기해줬는데! 지금 상태론 안 될 것도 되게 할 수 있었다.
비니는 콧노래를 부르며 팔까지 걷어붙이고 부엌에서 뚱땅뚱땅 난리를 피웠다. 생선은 먼저 기름에 구운 뒤 적당히 익었을 때 야채를 올리고 물을 붓고 미리 손질해둔 조개와 새우를 넣어 뚜껑을 덮어 익혔다. 냉장고를 한가득 채운 야채들을 꺼내 한입 크기로 썰어 큰 보울에 담았다. 그 외에도 더 만들려고 했지만 데이빗이 부엌에 난입해서 그를 말리는 바람에 겨우 두 가지만 만드는 데 그쳐야 했다.
평소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식탁이지만 데이빗은 데니스의 집에서 밥을 먹을 때보다 훨씬 표정이 좋았다.
비니는 빠르게 손을 놀리며 생선을 발라먹는 데이빗을 흘끗흘끗 보았다.
왜 저렇게 잘 먹지? 원래 고기보다 생선을 더 좋아하나? 너무 말라보여서 냅다 고기부터 많이 먹이긴 했는데. 그래도 그렇지, 이만큼 잘 먹을 수 있으면서 만날 내가 만든 스테이크랑 치킨을 칼로 난도질해놨단 말이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아니면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물어봤을 때 진작 대답하던가!
여태까지 데이빗이 밥 먹으면서 곧 죽을 사람처럼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어도 본래 그런 표정인건 줄 알았는데. 그래서 제가 해준 음식을 먹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는데. 따지자면 생선 요리도 제가 해준 거고, 결론적으로 데이빗이 자기가 해준 음식을 잘 먹는 거였지만 빈정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니는 나이프로 생선 눈알을 들쑤셔댔다.
한창 열심히 먹던 데이빗은 비니가 괜한 생선을 애꾸로 만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
“생선 뼈 잘 못 발라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비니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데이빗이 비니의 그릇을 제 쪽으로 가져가더니 생선뼈를 하나씩 발라주기 시작했다. 비니는 얼굴은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한 달 넘게 봤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 아저씨가 오늘따라 왜 이래? 생선이 그렇게 맘에 들었나? 아주 능숙한 솜씨로 포크랑 나이프를 쓰는데 얼마나 젠틀해보이는지.
“여기요. 훨씬 먹기 편할 거예요.”
“고, 고마워요.”
비니는 거의 접시에 고개를 처박을 기세로 생선을 퍼먹었다. 데이빗이 먹는 걸 보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는데 식사하는 내내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데이빗은 접시를 치웠는데도 여전히 고개를 처박는 자세인 비니를 대신해 냉장고 안에 넣어둔 상자를 꺼내왔다. 안에는 무화과를 올려 만든 파이가 들어있었다. 시럽에 졸인 무화과의 달콤한 향이 입에 퍼지고 나서야 비니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데이빗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지만, 그래도 예전보단 좀 풀어진 것 같기도 하고.
이 아저씨가 너무 좋은데. 나한테 잘해주는 걸 보면 마음이 있는 거 아닐까. 이혼하면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고. 그게 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비니는 카페에서 잠깐 보았던 데이빗의 전 부인을 떠올렸다. 긴 금발이 영화 같이 흩날리는 여자였지.
“금발이 취향이에요?”
데이빗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인상을 찡그렸다.
“아뇨. 딱히 그렇진 않아요.”
“그럼 부인의 어디가 좋아서 결혼했어요?”
“아내가 근시였거든요.”
근시? 비니는 눈을 깜박였다. 데이빗은 더 설명해주지 않았다. 금발이어서, 눈이 예뻐서, 웃는 입매가 예뻐서, 몸매가 좋아서, 세상에 널린 타입 중에서도 근시가 이상형이란 말은 또 처음이었다. 비니는 오늘 집에 가서 눈을 찌르거나 TV앞에 종일 앉아있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럼 왜 이혼하는 거예요?”
“아내가 다른 남자랑 거실에서 떡치고 있었거든요.”
식도로 넘어가려던 파이가 기도로 넘어갈 뻔했다. 한참을 콜록거리던 비니는 데이빗이 갖다 준 주스를 허겁지겁 마셨다.
“괜찮아요?”
“아저씨는 가끔 보면 괴팍하더라. 안 그렇게 생겨서는.”
“그런가요.”
데이빗은 천천히 제 몫의 파이를 먹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니의 눈에는 그 자리에서 식칼로 두 놈팡이를 찌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가 엄청난 인내심의 소유자이며 이성적이고 이지적인 신사로 보였다.
“이혼하면 또 결혼할 거예요?”
“바로 또 결혼할 생각은 없는데요.”
“그럼, 연애는 할 거예요?”
그 한 마디 하는데 입술이 바짝 말랐다. 비니는 혀로 재빨리 입술을 축이며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데이빗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하지 않을까요.”
* * *
그 날 이후로도 두 사람은 일주일에 두 번, 많으면 네 번까지도 만나서 함께 식사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데이빗이 먼저 연락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데이빗의 집이 있으니 데니스의 카메라는 걱정할 거 없이 있어도 된다. 같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귀찮을 땐 그냥 시켜 먹고 둘이 빈둥거릴 때도 있었다.
주말에 친구들의 연락을 싹 무시하고, 요즘은 데니스의 조수 노릇도 그만두었다. 데이빗의 집에서 그와 함께 주말을 보냈다. 그러다보면 아주 가까이에서 손이나 몸이 닿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뭔가 간지러워
괜히 자리를 피했다.
외박은 안 되니 저녁때마다 데이빗은 비니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었다. 데이빗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도로에 서있던 비니는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며 생각했다.
어쩌지. 나 이 아저씨가 진짜 너무 좋은데.
3
데이빗의 소원은 평범하게 사는 거였다. 눈에 띄는 건 사양이고 복잡한 일엔 끼고 싶지 않았으며 인생이 역절될 만한 이벤트도 사양이었다. 영화 같은 삶은 질색이었다. 어릴 적에는 집-학교-집-학교, 지금은 집-회사-집-회사를 반복하는 삶이지만 데이빗은 스스로의 삶에 만족했다.
그래서 지금 인생의 굴곡을 한 번에 몰아서 겪는 걸지도 몰랐다.
결국 아내와는 법원까지 갔다. 자식도 없는데다 이혼을 거부하는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서인지 이혼은 쉽게 성립되었다. 질질 늘어지는 문제는 재산 문제였다. 아내도 법정에 들어선 순간 이혼을 막는 건 포기한 것 같았다. 그녀는 전략을 바꿔 어떻게든 데이빗에게서 한 푼이라도 더 뜯어가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그녀의 변호사는 아내가 현재 직업이 없는 점을 내세워 생활지원금을 요구했고, 그녀가 여태껏 살림하며 가계에 기여한 점을 들먹이며 재산분할을 요구했다. 문제는 그 금액과 비율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거였다. 물론 이혼하면 아내는 당장 수입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리고 자산관리를 열심히 했다는 건 알지만. 갈라서는 마당에 매달 제 월급의 절반을 주고, 재산의 반을 내놓으라는 요구는 아무리 봐도 도둑놈 심보였다.
다행히 데이빗은 아주 실력이 좋은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는 별도의 재산분할 없이 아내가 요구한 생활지원금의 3분의 1만 내게 해주겠다며 호언장담했다. 데이빗은 법은 잘 몰랐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실제로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소송은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매주 법원에 출석해야 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꿈에서도 마주치기 싫은 여자의 얼굴을 맞대고 싸워야한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머리는 또 얼마나 굴려야 하는지. 변호사와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해야 저 인간들을 눌러버릴까 고민하느라 머리가 다 빠질 지경이었다.
만약 지금의 데이빗에게 이런 것들만 있었다면 이건 인생의 굴곡이 아니었다. 추락하는 낭떠러지였지.
“거기 있는 치킨 좀 줄래?”
“치킨이요? 알았어요.”
냉큼 손으로 치킨을 집어 제 접시에 올려주던 비니가 잠시 멈췄다.
“어, 나 이거 손으로 만졌는데 괜찮아요?”
“괜찮아.”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비니는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치킨을 마저 접시에 올려주었다. 데이빗이 작게 미소 짓자 눈을 도로록 굴리더니 애꿎은 비프스튜만 노려보았다.
귀엽기는.
처음 몇 번 만났을 때는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바짝 경계했는데 가만 보니 털을 세울 필요가 전혀 없었다.
비니는 저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전화할 때는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막말을 하는데 저랑 있으면 최대한 말을 고른다. 언제 또 시간이 되냐고 물을 때는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전 부인이 있다는 얘기에 새하얗게 질렸다가 이혼소송 중이란 말에 얼굴이 다시 폈다. 은근슬쩍 좋아하는 음식을 얘기하면 다음에 만났을 때 어김없이 식탁위에 올라와 있었다. 제가 왜 이 애의 속셈을 몰라 답답해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뻔히 다 보이는데.
함께 장을 볼 때 데이빗은 우연인 척 비니와 손을 겹치기도 하고, 식사준비를 도우면서 일부러 뒤에 바짝 붙어 얘기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지나치게 허둥거리는데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를 데리고 노는, 몰염치한 인간이 된 기분이었지만 성적인 뉘앙스보다 이런 간질거리는 제스처를 더 부끄러워하는 아이가 귀여워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는 불쌍한 강아지 보듯 바라보고, 아내는 시퍼런 눈으로 노려보고, 변호사는 머리 아픈 소리만 늘어놓는데 모든 걸 다 견뎌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데이빗에게는 허한 공간만이 남아있었다. 아주 귀여운 숨구멍마저 없다면 데이빗은 진작 머리가 돌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이 끔찍한 일상이 어린 꼬맹이 하나 들어오는 걸로 살 만해졌다. 스스로도 놀랐다.
변호사는 소송이 끝날 때까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자제하라고 했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이혼은 이미 확정된 사안이었다. 이 정도는 상관없겠지.
하지만 언제나 영화 속 불행은 경고를 무시하는 데에서 시작했다.
* * *
어느 날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송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아내는 데이빗을 찾아와 애원하는 건 그만두었다. 그래서 법정이 아닌 곳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장소가 어디건 아내를 보는 건 유쾌하지 않다. 이제는 만나봤자 서로 물고 뜯기밖에 더 할 게 없다.
데이빗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용건이 뭐야. 빨리 말해.”
“너무 보채지마.”
아내는 득의양양하게 턱 끝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데이빗을 약 올리듯 느리게 들고 온 서류봉투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우아한 손놀림으로 테이블 위에 사진들을 올려놓고 데이빗 쪽으로 밀어주었다.
사진을 본 데이빗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사진에 찍힌 건 데이빗과 비니였다. 둘은 꼭 붙어서 마트를 돌아다녔고, 함께 차에 올라탔고, 집으로 같이 들어갔다. 그냥 봐서는 별 의미 없는 사진이었지만 아내가 이 사진을 굳이 들고 와 제게 보여준 의도는 명백했다.
“허니, 5년을 같이 살았는데 이런 취향인 줄 몰랐어.”
아내는 목소리는 닭살이 돋을 정도로 가증스러웠다.
“차라리 맞바람을 피우지 그랬어. 데이빗, 이건 범죄야.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범죄라고.”
데이빗은 침을 한 번 삼킨 뒤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했다.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게 울리는 듯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 아니야.”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믿든 말든 그건 당신 자유지만 아닌 건 아닌 거야.”
“그럼 누군데. 친척? 당신 친척 중에 저 나이대의 애는 없잖아.”
“그냥 어쩌다 만난 사이야.”
“어쩌다 만났는데?”
“…….”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 설마…….”
데이빗은 눈을 부릅뜨고 아내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말을 멈추고 웃었다. 웃음소리가 괘씸하다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5년간 같은 침대에서 잤던 여자인데. 한껏 벌어져 웃는 입도 끔찍하고, 늘어진 금발은 징그럽고 높은 목소리는 혐오스러웠다. 경박스러운 웃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어 그를 찔러댔다.
“걱정하지 마. 설마 내가 당신을 신고하겠어?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남편인데.”
“……원하는 게 뭐야.”
짐작은 갔다. 아내는 눈치도 빠르고 계산도 빨랐다. 이 사진을 들고 가 미성년자 보호법 같은 걸 들먹이며 데이빗을 감옥으로 보낸다 해도 그건 그를 엿 먹이기만 할 뿐 재산분할소송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 했다.
“우리 매주 만나는 거 지겹지 않아? 자기도 회사 빠지고 나오느라 힘들고.”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만 끝내자. 지난 일은 묻고 새로 시작해야지. 우리 둘 다.”
그래, 새로 시작하고 싶겠지. 내가 준 돈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이 여자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할까? 예전에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면 이대로 뻗대볼까? 데이빗은 멍하니 테이블 위의 사진만 바라보았다. 사진 속의 비니는 해맑았고 저도 꽤 즐거워보였다.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은 하지 마. 더 확실한 증거도 있으니까.”
그게 뭔데? 하마터면 입 밖으로도 내뱉을 뻔했다. 데이빗은 동요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아내의 페이스에 말리는 건 최악이다. 그는 침묵을 지켰다.
데이빗이 한참을 가만히 앉아만 있자 아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결정내리기 힘든 건 알아. 시간을 줄게. 그 안에 현명하게 판단하도록 해.”
그는 고개를 숙이고 여전히 테이블 위의 사진에만 시선을 뒀다.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렸다. 데이빗은 손도 대지 않은 컵 안의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 굳어 돌이 된 데이빗을 깨운 건 그의 유능한 변호사였다. 전화를 받았더니 변호사는 당장 사무실로 오라고 자기 말만 하고 끊었다.
“데이빗,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변호사가 그를 붙잡고 소리 질렀다. 데이빗의 변호사는 한결 같이 제 의뢰인에게 예의를 지켰다. 항상 여유롭고 번지르르한 말만 쓰던 그가 이렇게 험악하게 소리 지르는 건 처음 봤다. 방금 전 아내에게 멘탈을 폭격당하고 온 데이빗은 변호사에게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무,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변호사는 데이빗을 집어던지듯 놓고 사진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이거 진짜입니까.”
데이빗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방금 전 카페에서 아내가 보여준 사진이었다. 그녀는 시간을 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
“진짜 원조교제 하시는 거예요?”
노골적인 단어에 데이빗이 펄쩍 뛰었다.
“워, 원조교제라뇨! 아니에요, 그냥 아는 애라고요!”
“그냥 어떻게 아는 사이신데요?”
아내가 물어볼 때도 그랬지만 변호사의 추궁에도 데이빗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돈 같은 걸 주면서 비니를 만나는 건 아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비니를 알게 된 과정은 불건전하기 짝이 없다. 아내나 변호사가 생각하는 추잡한 짓거리는 없었지만, 반쯤은 경찰서에 잡혀갈 짓거리를 한 건지도 몰랐다.
변호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마구 비벼댔다.
“데이빗, 저한테는 사실대로 말씀해주셔야……. 됐습니다.”
변호사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는 제 손에 들린 사진들을 천천히 살폈다.
“이 학생 연락처는 있으세요?”
“……네.”
“저한테 좀 알려주세요. 그리고 이건 제가 어떻게든 처리해보겠습니다. 대신 공판날짜는 미루는 게 좋겠어요. 데이빗도 당분간 그 애는 만나지 마세요.”
변호사는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뭐라 말을 하는데 변호사 입에서 나오는 말은 조사 빼곤 못 알아먹을 말들뿐이었다. 데이빗은 조용히 나왔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새로 이사한 집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데이빗은 택시를 탈 생각도 못 하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하나씩 더듬으면서 짚어나가면 또 그날 그때 호텔 밖으로 나가지 말았어야 한다는 결론만 나왔다.
왜 하필 그날 비니를 만난 걸까.
왜 성인만 들어올 수 있다는 클럽에 비니가 떡하니 들어오게 된 걸까.
그 젊은 애들을 다 놔두고 자기에게 접근한 이유가 뭘까.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은 하지 마. 더 확실한 증거도 있으니까.’
데이빗은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막장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제 호텔방에도 멋대로 쳐들어왔던 아내가, 어떻게든 제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돼있던 아내가 비니의 일을 몰랐을 리 없다. 비니에게서 연락이 온 건 그날 뒤로도 며칠이 지난 뒤였다.
만약에 저에게 돈을 요구할 생각이었던 비니가 제 뒤를 캐고 다니던 아내를 만났다면. 그래서 둘이 작당을 했다면. 이 모든 게 두 사람이 쓴 시나리오였다면.
그렇다면 모든 게 다 설명되지 않는가. 새파란 어린애가 저 같은 아저씨에게 접근한 것도, 식사를 하자면서 CCTV가 달린 집으로 끌고 온 것도, 아내가 가고 난 뒤에 비니가 나타난 것도, 이사 온 집에까지 쫓아온 것도.
그래, 너무 절묘하지 않나?
어쩌면. 어쩌면.
그때 데이빗의 휴대폰이 울렸다. 비니의 전화번호가 떠있었다.
그리고 그는 휴대폰을 꺼버렸다.
* * *
유명한 소설에 이런 말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매튜 헤럴드는 살면서 그 제각기의 이유를 모두 체험하고 있는 경이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변호사 생활 10년 중 8년은 한 가정을 완전히 박살내는 데에 쓰였다. 살인사건의 공판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사이코패스보다 더 미친놈들이 나타나는 곳이 바로 가정재판소였다. 의뢰를 세 탕 뛰고 오면 TV 속 막장드라마가 힐링 프로그램처럼 느껴졌다.
부부가 갈라서는 이유를 300가지도 넘게 본 매튜에게 데이빗의 케이스는 아주 무난하게 보였다. 자기 집에서 배우자의 내연관계를 마주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게다가 자녀도 없다니. 양육권 전쟁 때문에 골머리를 썩을 필요도 없었다. 이혼 옆에 붙어있는 재산들이 좀 골치가 아프긴 했지만 이 정도는 있어야 일한다는 느낌이 들지. 이보다 더 순탄한 일은 없었다.
고 생각했는데.
사무실 앞으로 도착한 서류봉투 하나가 모든 걸 망쳐놓았다.
처음 그 사진들을 보았을 때 매튜는 현실을 부정했다. 아무리 잘 봐줘도 스무 살 넘게 차이나 보이는데. 뭐, 친척이거나 이웃집에 사는 애라던가.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그러나 서류봉투의 보낸 이에 아내 쪽 변호사의 사무실 주소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것이 매튜를 현실로 끌어냈다.
이건 대놓고 협박하는 거다. 우리가 가진 걸 봤으면, 조용히 우리랑 합의하자고. 총을 들이밀고 신체포기각서를 쓰게 하는 갱단이랑 다를 게 없었다.
매튜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제 의뢰인에게 소리를 질렀다. 데이빗은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표정을 보니 아닌 게 아니었다. 매튜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솔직하게 말해 달라 부탁했을 때 언제 의뢰인이 솔직하게 말해준 적이 있던가. 법정 싸움은 그 인간이 가진 밑바닥까지 들춰내는 싸움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밑바닥을 끝까지 숨기려고 애썼다. 고객들의 그 발버둥이 항상 그를 궁지로 몰고 갔다.
여전히 열이 뻗치지만 제가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궁지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매튜는 일단 문제의 학생을 만나보기로 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아주 급한 일이거든요.”
학생은 긴장으로 뻣뻣한 목을 억지로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로 ‘데이빗의 개인 변호사 매튜 헤럴드입니다.’라고 말하자마자 바짝 굳었던 아이는 실제로 만났어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혹시 또 상대방 측에서 미행이 붙을까봐 일부러 카페가 아닌 한산한 공원에서 만났다. 아이에게 콜라 캔을 하나 쥐어줬지만 먹을 생각도 못 하는 듯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데이빗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아이들은 어른들과 다르다. 법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일단 겁부터 집어먹었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했다. 솔직하게 사실을 말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믿는 나이였다.
덕분에 매튜는 모든 사정을 알게 되었다. 이 아이가 어떻게 데이빗을 만났고,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이도 떳떳하지는 못한지 어물어물 숨기긴 했지만 갑자기 거짓말을 하니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매튜는 웃는 낯으로 하나하나 꼬집으며 거짓말을 추궁했고 아이는 결국 모든 걸 털어놓았다.
결론은 데이빗이 매우 양심 없이 이 어린애와 연애 비슷한 걸 하고 있지만, 돈으로 애들을 사는 소아성애자는 아니라는 거였다.
“그러니까 금품이나 다른 걸 받은 적은 없다는 거죠?”
“날 창녀 취급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 마땅히 법으로 보호해야하는 약자라 생각하고 있죠.”
다행히 최악은 면했다. 머리를 잘만 굴리면 유리한 현 상태로 소송을 끝낼 수 있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매튜가 비니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비니, 내 말 잘 들어요. 지금 비니 때문에 데이빗이 소송에서 질지도 몰라요.”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하자 비니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두 사람이 연애하는 건 신경 안 써요. 하지만 그것도 전 부인이랑 일이 잘 끝나야 가능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쪽에 협조해줬으면 좋겠어요.”
“어, 어떻게요?”
“며칠 뒤에 법원에서 비니를 참고인으로 부를 수 있어요. 그때 제가 말하는 대로 증언해줬으면 해요. 물론 비니에겐 전혀 피해가 안 가도록 할 거예요. 그래도 싫다면 안 나와도 돼요.”
“아뇨. 나갈게요.”
“좋아요. 지금부터 데이빗이랑 비니는 요리 동호회에서 만난 거예요. 레시피를 공유하려고 마트도 가고 집에도 가서 같이 요리한 거고요. 잤다거나 이런 일은 없는 거예요. 알았죠?”
원래 법정싸움은 위증싸움이다. 저쪽에서도 평범한 사진을 말도 안 되게 부풀려서 떠들어댄 거니, 이쪽도 그럴 뿐이었다.
비니는 비장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도를 보니 상대편으로 넘어갈 일은 없어보였다. 매튜는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주라며 제 명함을 넘겨주고 돌아왔다.
일단 한 고비는 넘겼다. 즉석으로 지어낸 조악한 거짓말이 어디까지 먹힐지 모르지만 저쪽에서 또 수작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그럭저럭 괜찮을 것이다. 이제 무사히 넘어가기만을 빌어야지.
* * *
지금 비니의 머릿속에는 딱 한 마디만이 둥둥 떠다녔다.
‘데이빗이 소송에서 질지도 몰라요.’
소송에서 질지도 모른다니, 질지도 모른다니. 어쩐지 전화도 안 받더라. 그럼 이혼 못 하는 건가? 이혼 못 하면 난 아저씨랑 어떻게 연애하라고! 데니스한테 허락도 받고. 난 준비도 다 했는데. 그 아줌마가 늙어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내 순서가 올 때까지? 그 아줌마보다 아저씨가 더 먼저 죽을 것 같다고!
비니는 손안에서 콜라 캔을 데굴데굴 굴렸다. 캔에 맺힌 물방울 때문에 손이 축축했다.
아냐, 아냐. 그 변호사 아저씨가 잘 끝내준다 했잖아. 말도 잘 맞췄고. 이대로만 말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변호사라는 사람인데 내가 증언하면 알아서 잘 끝내주겠지.
비니는 캔을 따 안에 든 콜라를 한 입에 다 마셨다. 텅 빈 캔을 근처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지만 멋지게 빗나갔다. 아씨, 재수도 없네. 투덜거리면서 돌아서는데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데이빗이었다.
‘잠깐만 우리 집으로 와줘요.’
비니는 방금 전까지 징징거리며 우울해하던 것도 잊고 그저 기뻐서 한달음에 데이빗에게로 달려갔다. 문을 두들기며 “아저씨, 당장 나와요.”라고 장난스럽게 말할 때만 해도 마냥 신났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난폭한 손길이 비니를 집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비니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데이빗이 비니를 벽 쪽으로 밀쳤다.
“그 여자한테서 얼마를 받고 나한테 접근한 거야?”
“네? 그게 무슨……. 아파요. 이것 좀 놔 봐요.”
“말 돌리지마. 그 년한테 얼마 받았어?”
“무슨 소리에요? 돈 같은 거 받은 적 없어요.”
“시치미 떼지도 마. 아내랑 짜고서 날 엿 먹이려고 하는 거잖아!”
데이빗이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그러자 비니도 똑같이 소리 질렀다.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에요! 내가 아저씨 부인이랑 짜긴 뭘 짜요! 무슨 돈을 받았다고 이래요!”
데이빗의 팔이 비니의 목을 누르고 짓누르는 통에 숨이 막혔다. 눈물이 찔끔 나고 턱끝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비니가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데이빗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정도도 분간 못 할 바본 줄 알아?”
“이것, 좀, 놓고 얘기해요.”
“처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아저씨, 제발.”
“그게 아니라면 왜 너 같은 애가 나한테 접근하겠어.”
“좋아하니까요.”
“뭐?”
놀란 데이빗이 살짝 팔에서 힘을 풀자 비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있는 힘껏 밀쳐냈다.
“좋아한다고요, 좋아한다고! 씨발 존나 좋아서 접근했다고!!”
놀란 데이빗이 비니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이번엔 비니가 악에 받쳤다.
“좋아한다고요 씨발!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가 왜 아저씨한테 치근덕거리고 팔 빠지게 요리해서 해다 바쳐요! 부인이 뭘 어쨌다고요. 왜 나한테 화풀이해요!”
데이빗은 멍하니 있다가 말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그, 그치만 처음에 날 경찰서에 신고하겠다고 했잖아.”
“농담이죠. 그걸 진짜로 들었어요? 농담 몰라요?”
“아내한테 연락받고 카페로 온 거 아니야?”
“지나가다 봤다니까요. 왜 이렇게 사람을 못 믿어요?”
“네가 간 집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우리 집 아니에요. 거기 사는 사람이 인터넷 방송하려고 달아둔 거라고요.”
“조, 좋아한다면서 왜 밥만 먹여.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하잖아.”
“난 좋아하는 사람한테 먹이는 게 좋다고요. 아저씨가 먹는 걸 보면 존나 흥분된다고요!”
데이빗은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저렇게 짜 맞춘 아내와 비니의 짝짜꿍 함정설은 완전히 틀린 거다. 전제부터 틀렸다. 이런 어린애가 저 같은 아저씨에게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을 리가 없다는 전제 말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이의 마음이 훤히 보인다고 자신만만해 했으면서.
“아저씨 변호사랑 만났어요. 나 때문에 소송에서 질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래서 요리 동호회에서 만난 걸로 하면 된다고 했단 말이에요. 며칠 뒤에 법정에 나오라고도 했다고요.”
비니는 정말 서러웠다. 아저씨가 이혼을 못 하면 사귀지도 못 하니까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그래서 법원까지 가겠다고 얘기했는데. 이렇게 아저씨가 좋은데.
“왜 나한테 화풀이해요. 나 아저씨 부인 아니란 말이에요. 왜 나한테 그래요.”
비니는 이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데니스의 말이 옳았다. 비니는 20년 뒤에 자기를 좀 더 아껴줄 만한 상대를 만났어야 했다. 자기 멋대로 오해해서 윽박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데이빗은 비니가 엉엉 소리를 내며 울자 너무 당황해 팔만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이 어린 애에게 제 불안감을 다 쏟아냈다는 사실을 깨닫자 너무 민망하고 쪽팔리고, 미안했다. 어떻게 해야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도 달래고 제 마음도 전해줄 수 있을까. 데이빗은 일단 아이를 품에 안았다.
제 품에 안겨 훌쩍거리던 비니의 등을 토닥이는데 묵직한 주먹이 제 배를 강타했다. 밥도 새 모이만큼 먹고, 빼빼 말라서 어디 가서 힘이나 쓰겠나 싶었는데 역시 젊은 애의 근력은 달랐다. 순간 숨이 억 하고 차올랐다. 데이빗은 배를 쓰다듬지도 못 하고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안해. 나도 너 좋아해. 너한테 배신당한 줄 알고 순간 정신을 잃었어. 미안해.”
그러자 비니는 더 큰 소리로 울며 데이빗을 두들겨 팼다. 지은 죄가 있어서 비니의 팔을 붙잡아 말리는 대신 제 몸을 순순히 내주었다. 데이빗은 입을 꾹 다물고 비니의 주먹질을 견뎌냈다. 하지만 정강이를 걷어 채였을 때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 되면 온몸에 피멍이 들 것 같았다. 어쩌겠는가. 그게 데이빗이 앞으로 감당해야하는 무게였다.
* * *
소송은 무난하게 끝났다. 예상대로 아내 쪽에서는 비니와의 관계를 물고 늘어졌지만 비니가 법정에 나서서 증언한 덕에 그들의 무기는 효력을 잃었다.
“원조교제라뇨. 제가 왜 그런 창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죠.”
청순한 얼굴로 가는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 한 방울 또르르 흘리는데 누구도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던 아내의 말은 블러핑이었다. 덕분에 데이빗은 재산분할소송에서도 승소하고, 아내에게는 그녀가 직장을 구할 때까지 소정의 생활보조금을 지원해주는 걸로 끝났다.
“연기 잘하던데요.”
“우리 아빠가 배우거든요.”
“배우?”
“내 이름이 빈스 주니어 리조라니까요. 우리 아빠는 누구겠어요.”
빈스 리조. 생각해 보니 최근 영화에 자주 보이는 배우였다. 늦은 나이에 연기를 시작한 교도관이 배우로서 도약한 성공 신화라며 뉴스에서 떠들어댄 것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비니랑 계속 만나려면 비니의 부모님들도 만나야겠지. 상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각종 자질구레한 일을 모두 처리한 데이빗은 비니에게 먼저 연락했다. 그리고 비니가 빌린 집도, 제 집도 아닌 전망이 아주 좋은 레스토랑으로 그를 안내했다. 남자애니 꽃다발은 생략하고 대신 심플한 모양의 반지를 준비했다. 물론 비니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만. 저 천진하고도 매혹적인 미소를 묶어두려면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야할테니까.
“정식으로 고백하는 거예요. 좋아해요, 비니.”
그래도 미리 점찍었으니, 데이빗은 처음 마음먹은 대로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